슬픔에도 권리가 있을까
아무래도 그 사건이 아닐까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오는 분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한다. 대개 어린 시절 가족과 잘못 형성된 관계 속에서 학대를 받거나 상처를 받은 기억이 성인이 돼서 발현되거나, 성인이 된 후로는 직장생활이나 애인과의 관계에서 불건전한 관계가 지속되거나 마지막으로는 어린 시절 혹은 성인기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같이 큰 사건 이후 찾아오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 역시 나와 같은 경우가 조금은 복잡한 케이스라고 했다. 아무리 상담을 해봐도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가족, 애인, 큰 사건 등 어느 것 하나에도 해당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서 선생님이 내준 숙제도 성실히 하고 어떤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 있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억을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억울했던 게 그리 많았나? 엄마가 어릴 때 그렇게 말해서 내가 상처를 받았나..? 근데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데.. 그 정도는 어릴 때 다 겪으면서 자라는 거고 내가 그렇게까지 힘들 정도로 상처받은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집이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나는 대학교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알바를 2개씩 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유학을 가고 여행을 가고, 하고 싶은 걸 온전히 실현은 못해도 살짝은 겪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게 문제인 걸까. 너무 열심히 살아서..?
애인과의 문제도 그렇다. 사실 누군가를 만나 상처를 주면 줬지, 상처를 받은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아 물론 일부러 상처를 주려던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들이 바라는만큼의 사랑을 주지 못한 것도 있을 것 같고. 대부분 좋은 사람을 만나 평이한 연애를 하고, 이별을 했다. 임팩트 있는 가슴 절절한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큰 사건만 남는데... 큰 사건이라...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너무 어려서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어른들의 죽음은 이런 건가.. 장례식장에서 고스톱을 치고, 우리 아빠는 손님을 맞으며 가끔 웃으며 대화도 한다. 언니들이랑 했던 대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아무리 할머니 연세가 많아도, 엄마가 돌아가신 건데 우리 아빠 너무 안 슬퍼 보여. 너무 한 거 아냐? 너무 슬프다.. 원래 어른들 장례식은 이런가?
그러다 할머니 발인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가 아이가 된 모습을 보게 됐다. 이미 딱딱하게 굳은 할머니를 붙들고 사람이 저렇게 울 수도 있을까.. 드라마에서 보던 그 장면이 정말 가능한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빠는 오열했다. 강하게만 보였고 어떨 때는 너무 밝아서 얄미워 보였던 아빠가 세상 떠나가라 목놓아 울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그리고 약간의 큰 사건이라면 내게는 할머니의 죽음과 아빠의 오열이 가장 강렬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공황 증상이 나타나거나 내가 일상생활을 힘들어할 만큼 아파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그래 2014년. 당시 해외 인턴십을 나가기 위해 미국 비자를 받아야 했다. 미국이라는 곳이 그렇게 콧대 높은 곳인지 모르고 당장 비자를 받아 다음 달에 출국할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비자는 그로부터 6개월이나 더 걸려 겨우 받을 수 있었고, 갑자기 짐정리를 끝내고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잠시 고시원에서 머물렀다. 그때만 해도 미국 갈 짐 정리하고 이민가방과 캐리어 하나로 1-2주만 머물 곳이 필요해서 들어갔던 곳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고시원에 누워서 천장이 무너질 것 같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증상을 많이 겪었다.
선생님, 이거 공황장애가 아니라 폐소공포증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생각해 보니 고시원에 지낼 때부터 증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전에 자취방이랑 기숙사에서는 그런 증상이 전혀 없었거든요.
몇 가지 질문을 한 선생님은 단호히 폐소공포증은 아니라고 말해주셨다.
고시원에 살 때 만났던 사람, 주변 환경, 있었던 일들을 한번 말해볼까요?
비자발급 때문에 광화문에 있는 미국대사관 근처에 있어야 했고, 출국 준비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해서 종각에서 영어 스터디를 하고 있을 때라 난 광화문 근처의 고시원에서 머물게 됐다. 집 안에서도 광화문 집회 소리가 울려 퍼졌고, 집 앞을 나가면 의경들이 닭장차 앞에 줄지어 앉아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는 모든 국민들이 한 마음이었기에 나 역시 토요일마다 촛불 집회에 나갔다. 별다를 것 없는 2014년의 날들이었다.
세월호 당일 혹시 기억나요? 뉴스를 보고 어땠어요?
안 믿겼죠... 그리고 그냥.. 뭐랄까 그냥 되게 이상했어요. 안 믿기고. 화도 안 나고 그냥 조금 멍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못 믿었던 거다. 선생님께서 '세월호'가 내 모든 증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가까운 사이라거나 혹은 그 지역에 연고가 있거나 그 또래의 동생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하물며 내가 교직에 종사해서 더 마음을 썼다거나 하는 일말의 연결고리조차 없었다.
저는 세월호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인데요? 심지어 저는 세월호 때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그런데 제가 세월호 때문에 슬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픈 거예요. 켈리씨. 그때 울었어야 하는데, 울지 못했잖아요. 그때 마음 놓고 슬퍼했어야 하는데, 계속 본인의 감정을 회피하잖아요. 꼭 세월호와 관련이 있는 사람만 슬퍼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말 가슴 아픈 사건이었잖아요. 국민 누구나 슬퍼할 수 있습니다. 슬픔에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에요.
난 왜 몰랐을까. 누구나 슬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말을 들으니 엄청난 안도감이 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군가 앞에서 눈물을 쏟아본 게 얼마만인지. 그 정도 눈물은 살면서 아마 처음이었을 거다. 민망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7년여간 내가 눈물을 참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 눈물은 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었다.
정말 내 안에 터져 나오기 직전까지 눈물이 가득 차있었던 걸까. 그 많은 눈물이 왈칵 그것도 타인 앞에서 쏟아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아마 선생님은 상담을 진행하는 지난 몇 달 사이에 이미 눈치를 챘던 것 같다.
내게 '감정'에 대한 질문을 자주 했지만, 나는 남 이야기를 하듯이 내 감정을 '생각'해 답했다고 한다.
"힘드셨어요?", "음... 글쎄요.. 몸은 힘든 게 맞긴 한데.. 그 정도는 뭐 다들 하니깐.. 그렇게 힘들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라든가. "슬펐겠네요?", "'슬프다'라... 음 슬프다기보단 약간 화나는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슬프면 마음이 막 슬퍼야 하는 거잖아요..?; 하하; 제가 막 슬퍼하고 그런 건 잘 없어서요."
지금 내 답변을 적고 보니 이런 AI가 따로 없다. 슬프면 슬픈 거고 힘들면 힘든 건데. 선생님께서는 내가 내 감정을 회피하고 자주 외면해서 아주 오래되고 단단한 스트레스로 자리 잡은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슬퍼할 자격이 어디 있어'와 같은 말로 슬퍼하지 못했고, 슬픔을 자꾸 외면해서 그게 신체적인 반응으로 지금에서야 나오게 된 거라고.
사실 그 설명을 들어도 온전히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선생님 앞에서 실컷 울고 나와 그때를 다시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니. 난 기자라는 직업을 언제 생각하게 됐나. 미국 출국을 준비할 때만 해도 대기업 입사를 목표로 미국 인턴십이라는 스펙 한 줄을 채우려고 노력했던 때였다.
그런데 미국에 돌아와서 갑자기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다. 왜 그랬을까. 난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그전에는 기자라는 직업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면접질문이 아니라 정말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난 돈도 없고 빽도 없으니깐 기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세상이 다 외면하고 사건을 덮으려고 해도 내가 기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내가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으니깐 절대 억울하게 사장되지 않게 내가 떠들어야지. 이런 생각...
기억을 더듬어보니 갑자기 기자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내가. 그리고 기자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세월호 기사를 지독히 쓰기 싫어했던 내가.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기자가 된 후 사회부에서 다양한 출입처를 받았는데 그중 세월호를 맡게 됐다. 세월호 기사는 당시 세월호 선체 유치와 기억공간 조성 등을 이유로 국회에서 자주 언급됐고 이와 관련해 유가족 성명서도 자주 나왔다. 또 진도 팽목항, 목포 신항 등 출장이 잦아 어린 막내 기자인 내가 맡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난 세월호 기사를 쓰기 싫어했다. 그냥 모르겠다. 마음이 무거웠고, 정치적으로만 비치는 것이 싫었다. 유가족 인터뷰를 해도 기사를 정치적으로 몰아가거나 혐오 댓글이 달려 내 의도와 다르게 그들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것 같아 싫었다. 잊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는데 세상은 자꾸 내게 세월호와 직면하라고 떠미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상담을 했고, 원인을 알게 됐고, 세월호와 직면하게 됐다. 그리고 나를 알게 됐고 내 감정을 직면할 수 있게 됐다. 어찌 보면 세월호가 나라는 사람을 살린 게 아닐까 하는 과한 생각도 든다. 아파하면서도 세상을 살아갈 진리를 배우게 해 줬으니깐. 누구나 슬퍼할 수 있다. 슬픔에는 자격이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