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울보가 되다
선생님과 눈물을 튼(?) 이후로 나는 울보가 됐다. 아니 울보가 되기로 결심했다.
상담이 진행될수록 마음의 안정을 찾고 '타인 앞에서 울어도 괜찮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눈물을 딱히 참지 않게 됐다. 사실 가족 한정 울보였는데,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눈물이 나는 게 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의 앞에서 울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달까. 정말이지 밀림 속에서 24시간 경계태세를 갖춘 치타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사람을 경계하고 긴장하고, 센 척을 했을까 싶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짓궂은 남자아이의 장난인지 폭력인지에 당해 정강이가 정말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났던 것 말고 밖에서 울음을 보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깍 깨물고 눈물을 참은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 흘린다는 말 자체가 내게는 허용되지 않는 문장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헤어질 것도 알고 있었고, 심지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던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난 눈물을 흘렸다.
'그게 뭐?'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게 내게는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애인과의 이별이 내게는 엄청 슬픈 사건이 아니다. 물론 많이 좋아했고,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사람이지만, 이별을 결심하기까지는 내가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고민을 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별=해방'을 의미했다.
어차피 서로 맞지 않았고 연애하면서도 언젠가는 끝나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담을 받고 있던 중 이별을 겪으니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상실감, 원망?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원 없이 펑펑 울었다. 왜 그랬을까. 그 정도로 미치게 사랑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사람을 핑계로 편히 울어보고 싶었던 걸 아닐까. 사랑한 정도로 치자면 그전에 사귀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대성통곡을 했어야 하는 게 맞는데. 왜 이렇게까지 울까? 나도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울고 나니 너무 시원했다. 그리고 지인들도 모두 알던 사이라, 남자친구와의 근황을 물어올 때면 최근 이별을 했고, 마음이 좋지 않아 울기도 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울 수도 있는 나'를 자랑스러워했다면 정말 소시오패스 같겠지만 지금 적고 보니 왠지 그런 느낌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서 눈물을 너무 쏟아내 취재가 어려웠던 적이 있다. 그 눈물을 계기로 나는 조금은 황당하지만 '퇴사'를 결심하게 된다.
바로 세월호 사고 지점을 방문했을 때다. 세월호 취재는 목포 신항, 진도 팽목항 등에서 자주 했고 이따금씩 세월호 선체 내부 취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동거차도 사고 지점에서 진행하는 '선상 추모식'에 가게 됐다. 사고 지점에서 아이들에게 인사하며 헌화와 짧은 묵념을 하고 오는 추도식 같은 것이었는데 사실 기자들에게는 이동시간만 왕복 10시간이 넘고 힘든 것에 비해 '그림'이 별로 나오지 않는 취재로 여겨져 굳이 동행까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가고 싶었다. '그림'을 핑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올해의 선상 추모식도 기록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부터 달려간 목포에서 집결한 후 다 함께 진도행 배를 탔다. 물살이 거센 지역을 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멀미약이 무색할 정도로 배가 세차게 요동쳤다. 그 소요 속에서 기사를 쓰고 촬영한 사진을 편집하면서 3시간을 달렸다.
이후 드디어 사고 지점에 도착했다. 나 역시 뉴스로만 보던 망망대해 같은 사고 지점을 목도하자 가슴이 탁 막혔다.
목포에서 3시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참.. 추웠다.
사고 지점에 도착하자 유가족들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온 곳일 텐데.. 처음 아이들을 잃은 것처럼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놓칠세라 카메라를 잡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뷰파인더로 유가족의 눈물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슬프다'라기보다 이런 생각이 많이 났다.
수년동안 몇 번이고 온 곳일 텐데....
자식을 잃은 고통은 세상의 그 어떤 고통으로도 표현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내가 보고 있는 이 모습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까지 와서 유가족의 눈물을 잘 담아내려고 흔들리는 배에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생경했다. 자괴감은 아니었다. 냉혈한 같은 모습이 죄송하긴 했지만 오히려 더 잘 담아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그래야 독자들에게도 전달력 있는 기사가 써지겠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뭘까. 자괴감도 아니고 온전한 슬픔도 아니었다. 그런데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후배들도 있었는데 참 민망했다. 나름? 냉철하고 이성적인 선배 역할이었는데 몇 년간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뭐 괜찮았다. 어차피 울보가 되기로 작정했으니깐.
동거차도에서 10분 내외로 진행된 선상추모식이 끝나고 뱃머리는 다시 목포로 향했다. 기사를 썼다. 여느 때와 같이 기계처럼. 그리고 또다시 3시간 여가 지나 목포에 도착한 후 나는 완전히 새로운 내가 돼있었다. 목포 신항에 거치된 선체를 보니 주책맞게 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이제 나는 세월호 취재를 하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난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물론 그게 퇴사일 줄은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