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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켈리오 Apr 27. 2023

네가 없었으면 난 어떻게 됐을까

아바라 소녀에게

뭐 힘든 일 있는 거 아니지?


그 말에 난 긴 침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 속에서 눈물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눌러 내렸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혼자 눈물을 삼켜내려고 아등바등하는 사이 침묵은 길어졌고 그 친구는 내 침묵에 기꺼이 동조해 줬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울고 있고 또 눈물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아직 말하기 힘들면, 너 좀 괜찮아질 때 말해줘.
나는 기다릴 테니깐 너 마음의 준비되면 나한테 꼭 말해줘, 알았지?


기분이 다운되고 힘들 때면 여리디 여린 몰캉한 멘탈이 행여 누군가에게 밟혀 으깨지지는 않을까 남이 버리고 간 껍질 속으로도 기어코 파고든다. 단단한 껍질 속에 숨고 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날 찾지 않길 바라며 몇 날이고 며칠이고 틀어박혀 앉아있는다. 그리고 이제 좀 해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싶으면 껍질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네곤 한다.



그런 내 습성을 아는지, 그 친구는 사람들을 만나도 괜찮다고. 사람들 만나서 힘든 이야기도 하는 거라는 말을 슬쩍 던진다. 난 친구들과 만나 누가 더 힘드네.. 하는 '불행 배틀'하는 대화가 싫다. 



마음이 힘들 때 누군가를 만나면 힘든 이야기만 주구장창한 후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우면, '세상 그런 자기 파괴적인 대화도 없었구나'싶어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좀 먹는 대화를 하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에 또다시 우울해진다.



내가 어릿광대도 아니 건만. 항상 웃고만 있을 수도 없는데. 난 왜 내가 항상 밝아야 한다는 자화상을 갖고 있을까. 힘들어도 괜찮지만, 그런 대화가. 그런 대화를 한 내 모습이 도무지 사랑스럽진 않다. 그런데 그 모습 또한 나인데. 그 모습도 어여뻐할 때가 되면 난 많이 성숙해져 있겠지. 



어여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도 내가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유일한 사람.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사랑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해?



우리는 25년 지기이다. 친구 결혼식 축사 때 이제 베스트 프렌드 자리를 남편에게 내어줄 테니 둘이 앞으로 평생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라고 쿨한 척했지만, 결혼 후 어쩔 수없이 소원해진 관계에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결혼생각은 없는 나였기에 앞으로 몇 년은 혹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쭉 이 간극은 벌어질 수도 있겠구나, 지레 짐작하면서 홀로 씁쓸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저 전화 한 통이면 다시 5년 전으로, 10년 전으로, 25년 전으로 돌아가는 사이였다. 눈물을 꾹꾹 참다가 못내 울음을 터뜨렸다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 또 웃다가... 울다 웃으니 내 눈물이 시시해지는 기분이라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본디 예민하고 경계심이 많은 타입이라 이렇게 내밀하게 누군가와 친하다는 사실이 한 번씩은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소위 '인싸'로 안다. 어디 가도 기죽지 않고, 할 말은 다 하고, 여기저기 잘 출몰하니깐. 그런데 내 인간관계는 그런 얕은 만남이 산재된 것 그뿐이다. 누군가 그 대열에서 이탈해 내게 한 발짝 다가올라 치면 저 멀리 도망가 버린다. 



굳이,,, 더 친한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생의 운을 다 써도 아바라 같은 이 친구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난 안다. 정신과를 가보라고 권한 것도 이 친구였고, 내가 또다시 무너질 때 옆에 있어 준 사람도 이 친구니깐. 이제는 수호천사 같은 느낌마저 든다.



통화를 끝낸 후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문득. 힘들다는 사람이 반가운 거구나. '불행 배틀이 아니라 힘들다고 토로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상담사 선생님이 했던 말을 곱씹으면서,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내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난 여전히 힘들지 않다고 내 힘듦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힘들다고 할 때 외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많은 용기를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다고 하는 네가 반갑다.

 내 눈물을 시시하게 만들어준 친구가 있듯이. 나도 힘들다고 하는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한 잔 권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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