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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켈리오 May 01. 2023

힘들다는 푸념이 용기있는 고백이 되기까지

맥주, 육개장, 개떡이 만들어낸 용기

너 육개장 좋아해?


누군가의 취향을 묻는 것만큼 따뜻한 질문이 있을까. 주말을 맞아 본가에 다녀온 친구가 어머니께서 직접 캔 고사리를 넣어 만든 육개장이라며 단단히 얼은 큰 덩어리 몇 개를 건넸다. 거기에 혹시 '개떡'이라고 아느냐고 물어온다.


흔히들 '쑥개떡'이라고도 하는 개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떡 중 하나기도 하다. 심지어 엄마가 직접 캔 쑥으로 만든 개떡이라니. 이만큼 설레는 말도 없었다. 나 역시 본가를 다녀오면서 가져온 고구마 한 바구니를 건넸다. 이왕 만난 김에 오랜만에 대화도 할 겸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4캔에 11000원 맥주를 골라 담아 안주도 몇 개 샀다. 주말 초저녁 편의점 앞 테이블에 육개장, 개떡, 고구마를 올려놓고 맥주를 한 모금씩. 보지 못했던 기간만큼 대화도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나 요즘 진짜 힘들었어

맥주를 한 모금한 후 별안간 푸념을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푸념이지만 사실 내게는 큰 용기를 낸 고백이었다. 4월의 어느 한주는 '지옥의 주'를 보냈다고 할 만큼 힘든 일이 몰아쳐 왔었다. '누군가에게는 힘들지 않을 수 있을만한 일인데 내가 멘탈이 약해서 힘든 것'이라며 힘든 것을 또 외면하려 했다. 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힘들면 힘든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됐다.


힘들었다 참.

어린 나이에 조금은 값싸게(전혀 싸지 않지만) 인생 교육받았다고 생각하라는 엄마에게 미안하고 죄송해서 힘든 티를 내지도 못했다. 또 누군가에게 터놓고 말할 정신도 없었다. 그러다 육개장과 개떡을 들고 온 친구에게 용기 내 말했다. 나 힘들었다고.


항상 알고 있었다. 힘들다 말하는 것의 힘을. 그 말이 나를 꽤 일으켜 준다는 사실도 말이다. 편의점 노상에서 마시는 맥주가 맛있어서, 나를 직면하는 이 순간이 개운해서,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주말 저녁 편의점 앞 노상에서 마시는 맥주가 참 좋았다.


그리고 내가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요즘 다시 정신과를 가고 싶지만 혼자 글을 쓰면서 잘 극복해 나가고 있다고도 고백했다. 일기장 같기도, 상담일지 같기도 한 이 글들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누군가 내 글을 라이킷 한 것에 흠칫흠칫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도 온라인상의 불특정 누군가에게 '나 힘들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글을 비공개로 돌리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 징징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이 너무 좋다. '나 힘들었어요', '저 힘들었어요', '나 힘들었어'




나 힘들어 안아줘


내가 아직도 몇 번이고 돌려보는 드라마 중 하나인 '멜로가 체질' 대화 중 하나이다. 죽은 남자친구의 환시를 보는 은정이 환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아픔을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터놓는 장면이기도 하다. 친구들은 다가와 은정을 안아주며 '고맙다'라고 말한다. 은정에게 저런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짧지만 깊었던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 손 가득 육개장과 개떡이 쥐어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내일 아침에는 육개장과 개떡으로 글을 써야지. 아니다 '4캔에 11000원'이 제목으로 더 좋으려나.


내게도 취향을 묻는 친구가 있어서.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참 좋은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며 지내지 않은 것이지 내게도 은정의 친구 같은 친구가 있었구나. 아침에 글을 쓰고 육개장을 해동해 따뜻하게 한 술 뜨고 5월을 기분 좋게 시작해야지.


'지옥주'가 있으면 '천국주'도 살면서 당연히 오지 않겠나. 그땐 고마웠다고. 육개장에 들어간 고사리를 먹고 힘이 났다고 꼭 말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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