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른이가 돼버린
내가 해맑았던 적이 있었을까?
문득 무해하게 웃고 있는 조카들을 보면서 튀어나온 말이다.
'해맑다'
사람의 모습이나 자연의 대상 따위에 잡스러운 것이 섞이지 않아 티 없이 깨끗하다는 뜻의 형용사.
'해맑았던 나'라... 꽤나 생경한 조합임에는 틀림없었다.
내 나이가 겨우 한자릿수였을 때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대화 주제가 있었다. 바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지, 아이로 남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어른이 될 건데 빨리씩이나 돼서 뭐 해
나는 이런 대답을 하는 애늙은이였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어른이 되면 길을 지나가다 마음대로 슈퍼에 들어가 과자를 살 수 있고, 더 큰 마트에도 갈 수 있고,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어"라며 진심으로 꽤나 부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슈퍼에 들어가 과자를 살 돈을 벌어야 하고, 마트에는 더 비싼 게 팔고, 밤에 돌아다니는 건 아마 야근을 하고 와서 일 확률이 많은데 그게 정말 좋은 건가...? 저 아이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을 미취학 아동 때하던 나였다.
다 커서 하는 생각과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냥 다 자라 버린 어른의 영혼을 가진 아이처럼 조금은 무심하고 시크한 아이였다.
물론 기어 다니고 한글이라는 걸 몰랐을 때로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도 본능적으로 해맑은 웃음을 짓는 천상 아이였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랜 시간 해맑지 못했으니 '해맑음 총량의 법칙'을 적용해 어른이 돼버린 지금 조금 해맑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난 법적인 성인이 된 이후로 '해맑다'는 말과 어울리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눈치 없는 행동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주변에 해맑은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들도 드디어 어른이 돼버린 탓이겠지.
그러다 보니 이제는 '해맑은 어른'이 꽤 귀한 시대가 돼버렸다. 조금은 생각 없고 세상 물정 몰라 보여도 이 나이에 무해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은 꽤나 큰 재능? 에 속했다.
사실 '해맑아지겠다'는 다짐을 하고 '해맑아지는 방법'을 생각하는 전형적인 T유형의 사람이라 진정한 해맑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가 시크하고 무심한 ENTJ가 조금 더 따뜻하고 해맑아지겠다는 다짐이 나로서는 나쁘지 않다.
'해맑은 애늙은이'는 이미 늦어버렸으니 이제부터 '해맑은 어른이'로 살아보려 한다. 오늘도 실없는 것에 웃으며 행복을 느껴보는 그런 어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