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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영 Sep 03. 2021

할머니와 8월 말의 여름

불편해서 생생하고 그래서 소중한

코로나가 터지고 할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기억 안 날 만큼 오래되었다는 거겠지). 내가 영국에 갔다 오기도 하고 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여름 동안 코로나가 내내 심해져서 도대체 언제쯤 뵐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얼마 전 내가 백신 1차를 맞아서 뵈러 가기로 했다. 할머니가 무조건 내가 백신을 맞고 나서 보는 것을 주장하셨기에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볼 수 있는 때까지 기다림이 길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할머니를 보러 부평에까지 갔다. 이왕 할머니를 보러 가는 거 할머니가 사는 곳에서 할머니 사는 것도 보고 오고 잠깐 몇 시간 동안만 할머니를 보는 것은 원치 않아서.


거의 처음으로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할머니를 보러 부평까지 간 것 같다. 그전에는 가족이랑 같이 차를 타고 가거나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신 적이 대부분이니까. 나는 최근에 산 최은영 작가님의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으면서 갔다. 소설에서도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 또 할머니가 나와서 할머니를 보러 가는 길에 마음이 묘해졌다. 손녀가 할머니를 보러 가는 길에 할머니가 손녀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소설을 읽는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났는데 내가 할머니를 기다리게 했다. 내가 내렸다고 전화를 했고 할머니는 내 전화를 받으면서 카드 찍는 곳 앞에 서있었다. 할머니가 살이 빠지고 뭔가 허리가 더 곧아지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조금 믿기지가 않았다.


할머니는 잘 알고 계시다는 누룽지백숙집에 나를 데려갔다. 이때부터 나는 할머니랑 둘이 다니는 것이 생각보다 더 내가 정신을 잘 차리고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가 코로나 이후로 잘 나오지 않으셔서 오래 걷지 못하시고 식당 같은 곳에서는 밥 먹을 때 외에는 마스크를 항상 쓰고 있어야 하는 것도, QR코드를 찍는 것도 다 익숙지 않으시다. 근데 내가 옆에서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조금 마음이 아팠다. 동시에 내가 계속 할머니를 지켜봐야 했어서 마음이 아플 새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식단관리를 해야 해서 많이 못 먹는다 했는데 할머니에게는 내가 아직 영국에서 돌아온 손녀이기에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먹이고 싶어 하셨다. 내가 한국에 온지는 벌써 3달이 가까이 되어가는데. 그래서 비싼 도토리묵과 3-4인 분양의 백숙을 시키셨다. 3-4인분 백숙만 토종닭을 쓴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시키신 것이다. 할머니가 남은 음식은 싸가서 며칠이고 먹을 수 있다 하셔서 일단은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나 때문에 할머니가 괜한 돈을 쓰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숙을 다 먹고는 영수증을 보여주면 할인을 해주는 식당 위층 카페에 가서 음료를 시켜 야외에 앉았다. 거기서 보는 할머니가 좋아 보였다. 나는 스코틀랜드에서 기념품으로 사 온 캐시미어 체크 스카프를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가 체크 색깔이 예쁘다며 좋아하셨다. 그래서 좋았다. 나는 라테를 마시고 할머니는 생강차를 마셨다.


집에 와서는 옷이 답답해서 할머니한테 갈아입을 옷을 달라 했고 나는 엄마가 할머니에게 주었다는 얇은 원피스를 입었다. 원래 원피스는 전혀 안 입지만 여름에 할머니 집에서 내 옷이 아닌 옷을 입고 있으니 무언가 좋고 신이 나기도 했다.


할머니가 냉장고에 내가 먹을게 뭐가 있는지 쭉 말하는데 파리바게트 빵을 사뒀다며 이걸 언제 먹으면 좋을지 계속 말했다. 지금 먹을지 아니면 저녁을 먹고 먹을지 내일 아침에 나가기 전에 먹을지 계속 얘기하셔서 내가 알아서 먹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가 살을 좀 더 빼길 원하시지만 먹는 건 언제 먹을지 계속 챙기셨다. 역시나 식단관리 중이라 빵을 많이 먹진 않았다.


할머니가 냉장고를 보며 말하는데 갑자기 큰 목소리로 ‘빵 줄까?!’라고 하셔서 웃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느라 평소 목소리랑은 다르게 휘어진 소리가 뾰족하고 그때 할머니의 표정이랑 몸짓이 소리에 흔들리는 게 느껴져서 귀엽고 웃겼다. 그래서 나는 대화 맥락과 상관없이 깔깔 웃었다.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나는 과일 깎기를 정말 못하지만 물렁 복숭아를 깎아서 투명 접시에 담아 할머니랑 나눠먹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티브이에 요즘 인기가 많은 트로트 가수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트셨다. 나중에는 내가 그 소리에 조금 머리가 아파서 잠깐 다른 것을 보자고 했는데 할머니가 조금 삐지신 것 같았다.


할머니가 티브이를 보거나 집안일을 하시는 동안 나는 가져온 필름 카메라를 꺼내서 흑백 필름으로 할머니를 찍기도 하고 집안 구석을 찍기도 했다. 이번에 꼭 할머니의 모습이나 할머니가 사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져왔다. 할머니가 생활하는 곳을 찍으면서 할머니가 여기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과연 혼자가 정말 괜찮으신 건지 궁금했는데, 더 생각하면 안될 것 같아서 지금 내 옆에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밤에는 습하게 더워서 잠을 잘 못 잤다. 할머니가 에어컨을 끄셔서, 그리고 할머니와 나의 수면 패턴은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사실 제대로 못 잘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새벽에 깨어서는 집 안에 김치 냄새가 솔솔 퍼졌고 그 냄새에 집중하느라 잠이 잘 안 왔다. 내가 다음날 12시에 수업이 있어 일찍 가야 한다 해서 할머니는 내가 먹을 아침밥을 고민하셨고 아마 그래서 김치를 미리 꺼내놓으신 것 같다. 근데 김치 냄새가 너무 강력했다.  


아침에는 정말 오랜만에 아침밥을 먹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는데 먹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할머니가 내가 밥 먹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해지신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나를 역까지 데려다주셨다. 할머니를 또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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