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발견'을 제시하는 동네서점 사대삼십육대구
홍성에 내려와 살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됐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다가 '우리는 왜 도시가 아닌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물음을 갖게 됐습니다. 지역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나만의 답을 찾아가고자 [우리는 이렇게]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시골 골목길 한편에서 작은 젤라또 매장을 운영하면서 함께 하는 동료,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고 있다.
젤라부를 열었을 때만 해도 차별화된 아이템만 있다면 충분히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창업 초심자가 가진 오만과 자만이었다. 젤라부를 통해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잊혔던 골목을 다시 찾아오긴 했지만, 작은 매장 하나만으로 골목이 활기를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가졌던 열정은 식어가고 몸과 마음도 지쳤을 쯤 골목에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골목길 청운관(중국집)이 있던 자리에 청년 창업가 2팀이 입주했다.
독립책방 ‘사십삼대십육대구’
수제 소시지 매장 ‘튜베어’
골목마다 개성 있고 매력적인 매장이 많아지길 바랐기에 새로 문을 열 공간이 어떤 모습일지 오픈 전부터 기대됐다. 한편으로는 몇 년 동안 골목을 지켜왔던 외로움을 털고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통해 활력을 얻고 싶은 마음도 컸던 것 같다.
특히 ‘사심삼대십육대구’를 운영하는 박재범 사장의 경우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제주도에서 식당을 부여에서 카페를 운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동갑내기라는 사실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던 걸까,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수시로 책방을 찾았다. 매일 찾아오는 사람이 성가셨을 법한데, 그는 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골목을 향한 애정과 삶을 바라보는 방향이 비슷했기에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덕분에 젤라부에서 영화제를 진행하기도 하고 위스키 모임을 기획하는 등 골목에서 재미있는 일들을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한적한 골목길에 위치한 독립책방,
그는 어쩌다 홍성에 이곳에 책방을 운영하게 됐을까?
포근한 봄 햇살이 비치는 사대삼십육대구에서 박재범 사장(별칭: 제이팍)과 이야기 나눴다.
제이팍은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지원하는 부여 청년창고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중 ‘집단지성(홍성 로컬커뮤니티, 청년마을 운영팀)’을 만나게 됐다. 집단지성이 준비하고 있던 청년마을 프로젝트와 골목 활성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홍성을 알게 됐고 창업을 준비하게 됐다.
“집단지성이 추진하는 청년마을 프로젝트와 골목 활성화 방향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다양한 기획과 마음 통하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홍성에서 재미있는 일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러 아이템을 고민하다가 책방을 선택하게 됐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읍내에 독립책방이 없었고 오래된 동네에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골에 살 때 가장 큰 단점을 고르라면 ‘문화생활’의 부재일 것이다. 운 좋게도 홍성에는 CGV나 메가박스 같은 대형 영화관이 있지만 일반적이고 단편적이기에 도시처럼 연극, 공연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기에는 제한적인 환경이다. 문화적으로 열악한 곳이지만, 제이팍은 ‘책과 책방’을 통해 골목에 새로운 가능성을 더하고 싶었다.
“다른 장르에 비해 ‘책’은 문화와 예술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고 ‘책방’은 책에 담긴 이야기(문화예술)를 소비하는 문화복합 공간이죠. 여기서 책방주인은 책에 담긴 이야기를 밖으로 해방시키고 사람들과 연결해 주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사대삼십육대구는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책이 가진 다양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문화예술과 사람 그리고 이 골목을 이어주는 문화기획 공간이고 싶어요.”
제이팍은 20대부터 청주, 서울, 제주, 공주, 부여 등 여러 지역을 거쳐 홍성에 머무르게 됐다. 익숙해진 삶의 반경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인데, 돈을 쫓기보다 스스로 세운 삶의 목표가 있었기에 새로운 선택도 두렵지 않았다.
“대도시가 아닌 시골이라도 얼마든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삶의 주 목표라면 돈벌이가 가장 많은 대도시로 가야겠죠. 하지만 본인의 삶을 챙길 수 있다면 도시나 시골 어디에 사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돈으로 제 삶의 반경이 결정되는 것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 보니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네요.”
특히 ‘쓸데없는 경쟁’은 서울을 떠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고 덧붙였다.
“서울에서는 모두가 열심히 뛰어다니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쉽게 낙오자가 되기도 하죠.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나를 맞춰야 하는 환경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본인만의 속도로 사는 삶도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서울을 벗어나야 했죠. 불필요한 경쟁에 집중했던 에너지를 책방 운영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사용할 수 있기에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대삼십육대구는 경험을 파는
독립서점으로 책과 독서를 통해
해방의 발견을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해방’은 사대삼십육대구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키워드이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경험을 쌓아온 제이팍은 ‘해방’이라는 단어를 통해 책방에 방문한 사람들이 본인만의 가치를 찾아가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제주도에서 지낼 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에 삶의 원동력을 고민하다 보니 ‘해방’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됐죠. 학교부터 직장까지 어디에나 소속되어 살아가는데, 본연의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소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보편적인 관습, 생각, 돈 등 우리를 옭아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행복해지겠죠. 저도 어디로부터 해방될 것인가 명확하지 않지만, 그 단어에 대한 존재를 고민함으로써 나답게 사는 순간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지역에 자연스레 스며들다 보니 어느새 홍성에서의 1년이 흘렀다. 작년 여름부터 손수 인테리어를 시작하여 겨울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책방을 시작했다.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따뜻해지는 봄과 함께 책방에서는 소셜클럽 ‘수다’, 필사모임 ‘독주’ 등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제이팍은 청년 창업가로서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는 작은 매장들의 역할과 끈끈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지역을 살리기 위해 여러 지자체에서는 주로 중소기업 유치 및 산업단지 조성에 심혈을 기울이는데요. 골목상권에 소상공인을 유치하고 지원하는 것도 그에 버금가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매장들의 매출규모가 높지 않아도 마을에 골목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지역에 매력적인 매장들이 늘어나고 골목이 북적북적 해질수록 찾아가고 싶은 살고 싶은 곳이 되겠죠. 우리 창업자들도 단순히 돈을 쫓기보다는 지역에 잘 스며들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값진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울의 성수나 을지로가 젊은 창업자들과 작은 가게들로 활기를 되찾았듯, 지역에서도 충분히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를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 결국 골목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건 건물도, 사업도 아닌 '사람'이다.
홍성 작은 골목길에서 만난 우리는 단순히 각자의 매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손님을 맞이하며 책을 읽고, 소시지를 굽고, 젤라또를 퍼내며 우리는 골목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되고 함께 성장하는 중이다.
우리가 사는 지역이 골목이 조금 더 따뜻하고 다채로운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책을 한 권 사거나 젤라또 한 스쿱을 맛보는 것 이상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쌓아가기를 바란다.
골목의 변화는 거창한 개발이나 정책이 아니라,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정과 연대에서 비롯되기에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 골목길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머물고 싶은 곳’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1)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만의 놀이터를 만드는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