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서 열리는 워크숍과 예술이 깃든 문방구... 이재환, 최선영 부부
매장을 운영하다 보면, 자연스레 사람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긴다. 문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 쇼케이스 앞에서 어떤 맛을 고를지 고민하는 표정, 친구와 나누는 말투까지. 작은 단서들로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 한적한 오후, 스쿠터에서 내린 두 사람이 매장으로 들어섰다. 낯설지만 따뜻한 인상. 나긋이 미소 짓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동했다. 그날 이후, 조금씩 안부를 나누며 가까워졌고 자연스럽게 '이재환, 최선영'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을 지켜보게 됐다.
집 마당에 사람들을 초대해 워크숍을 하기도 하고, 주짓수 체육관에서 디제잉 파티를 열고, 보드게임과 그림모임을 진행하는 등 재미있는 일을 하며 본인들의 매력을 자유롭게 펼쳐 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심심하고 따분한 지역에 재미와 활기를 불어넣어 줄 소중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홍성살이 3년 차에 접어든 문화예술기획자이자, 중학교 2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이면서, 6마리의 강아지를 돌보는 집사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예술이 있는 문방구 ‘예방구’로 향했다.
복학생과 학부생으로 만난 두 사람은 졸업 후 결혼하여, 3년 뒤 소중한 아이를 얻었다. 행복한 나날들만 이어질 것이라 기대했으나 세 가족과 강아지 세 마리가 함께하는 도시 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행히 당시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창작기관에 입주하게 되면서 막연하지만 조금씩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을 키워갔다.
“주변이 온통 숲으로 둘러 쌓인 창작기관이라 강아지들과 함께 생활하기 너무 좋았어요. 수백 평이 넘는 광활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다시금 빌라생활은 하기 힘들겠다 생각했죠. 창작기관 근처 마당이 있는 집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터무니없이 비쌌어요. 한편으로는 이 분야에서 15년 가까이 활동했는데 내 집 하나 못 구한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느껴졌죠. 저는 체념하고 있을 때 오히려 남편(이재환)이 지역 이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어요.”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대유행하면서 아이도 1년 넘게 학교에 등교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멈췄던 시간, 두 사람은 지역에서도 다르게 시작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다른 분들은 지역살이를 준비함에 있어서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저희는 단순했어요. 우리 앞에 놓인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오히려 치열한 경쟁이 가득한 도시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버티며 살아가는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평판과 관계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아내(최선영)가 처음부터 지역살이를 반기는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몰두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아내도 점차 제 생각에 동의해 주었죠.”
예산을 넘지 않으면서 가끔 서울에 올라가야 하니까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이 가까운 곳 등 조건에 맞는 지역을 찾다가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에서 첫 지역살이가 시작됐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였다. 생활공간만 변화됐을 뿐, 두 사람은 평소처럼 좋아하고 재미있는 활동을 찾아가며 매일을 보냈다. 그런데 좀처럼 지역이 쉽게 그들은 품어주지 않는 듯했다.
“유구읍은 이사할 때까지 저희가 찾던 조건에 가장 부합한 곳이었어요. 그런데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서울 가는 버스노선이 폐지되기도 하고, 인구가 적다 보니 저희 활동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수요층도 부족했습니다. 평소 지낼 때는 몰랐지만 일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곳이 우리를 밀어내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아이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결정하게 됐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다시금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중심에 ‘아이’가 함께 있었다.
“유구읍은 공주 시내에서는 차로 30분 이상 떨어진 지역이었어요. 그래서 유구읍의 대부분 학생들은 택시를 타고 아산이나 청양으로 등교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공주시로 등교를 해도 ‘시골 애’라는 시선이 크다는 이야기에 이주를 결심했죠. 마침 홍성군 홍동에서 거주하던 분이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 덕에 홍성을 알게 됐어요. 부동산에 연락을 하고 집을 보러 온 첫날, 집이 너무 예뻐서 바로 계약을 하게 됐죠. 작업실이 있는 앞마당과 가까운 기차역, 걸어서 등교할 수 있는 중고등학교까지 완벽한 조건이었어요. 이사 후 홍성에 문화도시가 추진된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홍동의 다양한 커뮤니티도 알게 되면서 왠지 여러 방면으로 홍성이 우리를 반겨주는 느낌이었어요.”
반삭 한 머리와 날카로운 눈빛, 두 사람이 도시에서 왕성히 활동할 때 본인들의 모습에 대해 설명해 주는데 지금 앞에 앉아있는 모습과 완전히 상반되는 이미지에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지역살이로 변화한 삶의 태도는 그들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이야기했다.
“흔히 사람들이 ‘저기 수많은 아파트 중에 내 집 하나 없네’라고 볼맨소리를 하곤 하잖아요. 도시에서는 공간적으로 심리적으로 삶의 밀도가 굉장히 빡빡하지만 진정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오히려 소유할 수 없음으로 느껴지는 허탈감과 상실감이 컸던 것 같아요. 물론 지역에서도 내 것 하나 없지만, 문을 열고 나오면 펼쳐지는 하늘과 논, 들판을 바라볼 때면 그것들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져요. 공간적 여유로움에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이 큰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보니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눈에 독기가 많이 빠졌다는 둥, 온순해졌다는 둥, 다른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합니다.”
2022년 홍성으로 이주한 후 두 사람은 집 앞마당을 활용해 문화예술 리소스센터 ‘복많관’을 운영하기도 하고 도시재생센터 작은 공간에 입주해 예술이 있는 문방구 ‘예방구’를 꾸미기도 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활동이 문화예술적으로 거창해 보이고 심오해 보일 수 있는데, 두 사람은 지역살이와 문화예술활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본인들이 살아가는 상황에 맞춰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저희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데요. 공공기관과 협력해 시민 대상 프로그램이나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하기에 관련 내용을 연구하기도 하죠. 우리 삶 주변에서 묻어 나오는 문화예술적인 실천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기획으로 연결하기 때문에 평소에 좋아하는 일을 하며 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쿠터를 타고 둘만의 짧은 여행을 가거나 풍경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보드게임 모임을 하다가 문방구를 여는 등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 있어요.”
문화예술은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붙어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분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오랜 기간 문화예술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은 홍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선영 : “모든 예술가와 활동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청년 예술가들에게 지역은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큰 꿈을 가지고 대도시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도시는 경쟁이 치열하고 경력자들도 즐비해서 사실상 청년들이 기회를 얻기 힘든 구조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고 굳이 지역에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어야만 문화예술이 다양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일상의 다양한 부분을 문화적, 예술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한다면 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발현될 수 있을 겁니다.”
재환 : “홍성뿐만 아니라 여러 지자체에서 다양한 지원사업들이 추진되고 있기에 지역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예술적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지역을 바라보는 개인의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지원금을 오로지 생계나 자신만의 활동수단으로 여기지 않아야겠죠. 지역은 수도권보다 생활 여건이 여유로우니, 그에 맞춰 다양한 활동을 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본인만의 예술활동을 영위해 나가면 좋겠어요.”
서울, 경기 등 대규모 도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전문가가 포진되어 있고 새로운 판을 만들어주는 행정적 시스템도 체계적인 편이다. 이를 놓고 보면 지역은 문화예술의 불모지라 할 수 있다. 최근 선영은 충남문화관광재단과 함께 지역 문화예술가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이끌어주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충남이 문화예술 분야의 불모지라는 인식이 강한 편인데요. 오히려 저는 이 지역에 더 많은 가능성이 산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너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야 자유로운 사례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주변에 전문가 구성이 단조롭게 반복되면, 문화와 예술 역시 익숙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돼요.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이 엮이고 섞이면서 놀았을 때 더 재미있고 개성적인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재환과 최선영,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가지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예술은 특별한 장소나 도구가 아니라, 삶의 태도와 선택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
그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지역으로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덜 복잡한 삶을 선택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자 한 것이다. 도시에서 쌓은 경력을 내려놓고 마당에서 열리는 작은 워크숍과 동네 문방구 안에서 자신들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요란하지 않지만 가장 ‘예술적인 삶’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피어난 온기와 결이, 조용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익숙한 규칙보다 새로운 흐름 속에서 만들어가는 두 사람의 실험과 놀이는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더욱 궁금해진다. 두 사람을 통해 조용히 피어나는 문화의 온기, 그리고 그 결을 따라 모인 사람들로 홍성이 조금씩 더 특별한 곳이 되어가길 바란다.
* 이재환 예술가의 예술이 있는 문방구 '예방구' 인스타그램 @예방구
* 6마리 반려견과 홍성생활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최선영님의 인스타그램 @bokman_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