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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흙에서 키운 내일의 꿈

오와린 농장 '이재영 대표'

by 심군

홍성에서 살아가다 보면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를 담아 농사를 짓는 농부들을 만날 수 있다. 처음에는 조금 별종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와린 농장의 '이재영 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올해로 농사 4년 차가 된 그는 흙과 작물을 돌보며 자신만의 속도로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다.

오와린 농장 이재영 대표

오와린 농장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작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팽이 모양의 호박, 노란색 비트, 낯설지만 아기자기한 허브들. 그가 유기농법으로 일군 농장은 작은 실험실처럼 다채로웠다. 인터뷰를 위해 오랜만에 이재영 대표를 만났을 때,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다부진 체격에서 젊은 농부의 패기와 열정이 전해졌다.

오와린 농장에는 평소에 볼 수 없는 작물들이 가득하다.

홍성군 홍동면에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흔히 '풀무고'라 불리는 학교가 있다. 시골의 작은 마을을 특별하게 만드는 뿌리 같은 곳이다. 이재영 대표 역시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손으로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도예 고등학교 진학도 고민했지만, 일찍이 진로를 고정하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 풀무고를 선택했다.


"학교 이름 때문에 '풀무고'가 농부를 육성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요. 농업에만 초점이 맞춰진 학교는 아닙니다. 전임교육 중 노작교육이 있는데요. 그중 한 분야가 농업인 셈이죠. 풀무고에서 생활하면서 노동(농업)을 통해 성장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웠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누군가의 희생 위에 지금의 행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 같은 문제들을 진지하게 마주하게 됐다. 세상이 온전하지 않다면 내 손으로 직접 흙을 일구며 농사부터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다짐하게 됐다.


"1학년 때 처음 텃밭을 돌보게 됐는데요. 제 손으로 텃밭을 가꾸고 농장물을 수확하는 기쁨이 굉장히 컸습니다. 2학년 때는 마을 농장에서 실습을 하며 흙을 돌보는 일의 소중함을 알게 됐죠. 그렇게 조금씩 농사에 마음이 이끌렸던 것 같아요."

오와린 농장 전경

졸업을 앞두고 코로나가 전 세계를 멈추게 만들었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는 계획은 무산됐고, 그는 대신 홍동에 남았다. 그곳에서 ‘채소생활’을 운영하던 스승을 만나 농사의 깊이를 배울 수 있었다. 감사한 시간이었고,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년의 배움 끝에 그는 독립을 준비했고,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으로 오와린 농장을 세웠다.


"'오와린 농장' 이름에는 제 꿈이 담겨 있어요. '오리'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농사를 상징하고, '기린'은 평화와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작은 농장으로 시작해 언젠가는 교육 공동체로 확장되는 꿈을 두 이미지에 담았습니다. 농사를 통해 관계를 맺고, 교육으로 서로가 성장하는 것, 그 모든 과정은 공동체 안에서 완성될 수 있다고 믿어요."

오와린 농장은 유기농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는 유기농과 관행농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농부의 철학과 태도에서 시작됨을 강조했다.


“농사를 하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관행농은 흙을 단순히 생산도구로 본다면, 유기농은 흙 속의 생명을 마주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관행농’이나 ‘유기농’이라는 말은 단순한 구분일 뿐 그 사이에는 수많은 개념들과 방식이 존재하죠. 농부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농사에 임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농장은 흙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균형 있게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농사가 자아실현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지속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경제적 고민이 뒤따른다. 특히 소규모 농장일수록 생존을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오와린 농장을 운영한 지 4년 차, 이재영 대표는 작지만 단단한 농장을 만들어가려고 노력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관행농은 결국 규모의 싸움인데요. 그렇다고 유기농도 대규모로 확장해야 하는 걸까, 늘 고민이 됩니다. 규모의 경제로 운영할수록 멀칭이나 경운, 화학비료 같은 것들을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죠. 게다가 큰 자본이 필요한 방식이라 농부들이 접근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작은 땅에서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어가는 '시스템 집약화'가 돌파구라고 생각해요. 일본 도요타의 자동차 생산 시스템을 농업에 접목한 사례처럼, 작은 땅이라도 다양한 작물을 순환시키며 관리하면 더 건강하고 효율적인 농장을 운영할 수 있거든요."


작물을 고를 때도 그는 나름의 기준을 세워왔다. 시장에서 얼마나 희귀한 작물인지, 생산과정에서 순환이 잘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얼마나 지속적으로 수확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이 세 가지를 중심에 두고 우선순위를 정한다.


"예컨대 토마토처럼 긴 수확 기간을 가진 채소는 안정성을 줍니다. 반대로 재배 주기가 짧고, 희귀하면서도 가격이 좋은 작물은 수익성 측면에서 매력적이죠. 추가적으로 농부의 취향도 농장운영에 크게 반영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물을 심기도 하고 동시에 시장성을 고려하기도 하면서 해마다 작목의 수를 줄이고 정리해 왔어요. 그렇게 조금씩 농장의 체계를 갖춰왔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유기농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홍동'이 가진 공간의 힘이 있었다. 유기농업, 친환경 농업 등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기에 유기농 자재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하지만 청년 농부로서 느끼는 고충은 다른 영역에 있었다.


"홍동은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유기농 지역인 만큼 체계와 단체가 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다소 벽이 느껴지기도 해요. 익숙한 틀 속에서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편안한 장소일 수 있지만, 기발하고 독창적인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제약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것 같아요. 제가 일을 일찍 시작하기도 했지만, 지역에서 속 시원하게 신세한탄을 함께 할 또래친구를 만나기 쉽지 않다는 아쉬움도 크죠."


그럼에도 그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다. 앞으로 5년 안에 지금의 농장을 다져내고, 10년 안에 교육 농장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그곳에서 배운 사람들이 홍동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돕고, 20년 안에는 농업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농업뿐만 아니라 디자인, 제작, 코딩 같은 전후방 산업에 종사하는 청년들이 함께 협동조합을 이루어 지역에 남게 하는 것, 그것이 이재영 대표의 큰 그림이다.


긴 대화 끝에 알게 됐다. 오와린 농장은 단순히 작물을 키우는 땅이 아니었다. 흙을 매개로 사람이 만나고, 관계가 자라며, 교육과 공동체의 씨앗이 뿌려지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삶을 일구는 일이 얼마나 단단하고 아름다운가를 묵묵히 증명해내고 있었다. 그 흔들림 없는 길 위에서, 농업을 넘어 사람과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걸음을 통해, 땅을 지키고 삶을 일구는 일이 결국 미래를 세우는 가장 근본적인 힘임을 깨닫게 된다.





[프롤로그] 우리는 이렇게 프롤로그

(1)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만의 놀이터를 만드는 농부

(2) 꿈의 바탕을 만들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3) 잊혀진 골목에서 가능성을 품은 공간으로

(4) 시골동네 한가운데, 한약국이 필요한 이유

(5) 함께한 시간이 우리를 이곳에 머무르게 했다

(6) 털보 아저씨의 17년간 변하지 않은 신념

(7) 탈 서울, 인 소울...당신은 무엇을 쫓는가?

(8) 도시 밖에서 청년 창업가로 살아가기

(9) 오늘을 단정히 살다 보면, 내일도 예쁠 거예요

(10) 빽빽한 도시 빌딩 숲, 그곳에 우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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