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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Jul 19. 2021

당근, 난 아무것도 모른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당근!


중고거래 사이트 '당근 마켓'에 책 몇 권을 올려놨더니, 경쾌한 알림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몇 권의 책에 관심 있습니다. 아직 이용할 수 있나요?]

말투가 남자? 당근 생활 몇 년에 낯선 이의 성별부터 감이 탁 온다. 


[Become a better you와 7 habit 비용은 어떻게 되나요?]

올려놓은 책 중에 영어 원서만 꼭 집어 묻는다. 


오호! '자기 계발에 관심 있는 영어 리딩이 가능한 남자!' 내 머릿속에는 낯선 이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쌓아 올린다. 


[지금 춘천을 벗어나고 있는데 내일 아침에 돌아와 가져 가도록 하겠습니다.]

말투가 꽤 예의 바르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자기 계발에 관심 있는 영어 리딩이 가능한 예의 바른 남자!'

점점 모르는 이에 대한 정보를 덧붙이며, 대면할 인물 창조에 속도가 붙는다. 


"여긴 xx아파트입니다. 출발할 때 연락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판매 중'을 '예약 중'으로 바꾸고, 내일 아침 기분 좋은 만남을 기대해본다. 


낯선 이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당근.

다음 날 아침,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몇 시에 시간 되실까요?]

"11시 어떠세요?"


정중한 물음에 나도 정중하게 제안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한다. 답이 없다. 여러 번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도 아무 답이 없다. 오후 5시가 다되어 당근이 울렸다.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지도에서 따라갈 수 있도록 주소 보내주세요.]

뭔가 조금 이상하다. 정확한 주소까지 요구하다니. 뭐 그럴 수도 있지! 넓은 아량으로 주소를 정확히 찍어 보내준다. 


[거리가 너무 멀어 그러는데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허걱.  영어책 2권에 5,000원 받겠다고 배달까지? 그건 아니지.


"죄송~ 그건 힘드네요. 오시기 힘드시면 구매 취소하셔도 괜찮아요."

한참 소식이 없더니 당근이 울리고 문자가 띡 왔다. 그걸 본 순간 내 눈이 확 뒤집어지고, 뇌에서 육두문자가 마구 튀어나갈 준비를 하며 부글거렸다.


[좋아, 내가 뭘 할지 보고 45분 후에 알려줄게.]


뭐야? 이 시이끼! 

갑자기 반말에, 지가 뭘 할지 보고 그것도 45분 후에 알려준다고? 누가 알고 싶냐 했냐고? 니가 뭘 할지.


안 판다. 이 미친 시이끼야!, 라고 바로 응대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난 마음공부하는 수행자니까. 

깊은숨 몰아쉬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톡을 보냈다. 물론 이번 대답도 반말짓거리면, 다 엎어버리겠다 칼을 갈며. 득득.


"지금 저에게 하는 말인가요?"

[죄송합니다. 6시 15분에 오겠습니다.]

급 예의 바른 모드다. 진짜 뭐야? 궁금하다. 어떤 면상인데 이렇게 반말과 존대를 냉온탕 오가듯 쉽게 하는지.


궁금하다. 누군데 이렇게...

6시 30분이 넘었다. 남편이 배고프다 보채니, 김밥을 싸러 부엌에 들어갔다. 손에 든 것도 당근이요, 정신도 온통 당근이다. 


-당근.

드디어 울렸다. 톡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나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앞에 있다.]


이 시이끼가. 이젠 막 가자는 거야 뭐야. 오냐! 내가 누군지 오늘 확실히 보여주마. 내가 암 것도 모르는 20대 순진한 처자가 아니라는 걸. 산전수전 다 겪고 공중전 치르는 중인 중년의 아줌마라는 걸.


난 씩씩거리며 김밥 싸던 비닐장갑을 벗어던지고, 쓰레빠를 질질 끌며 뛰쳐나갔다. 책 두 권을 챙겨 들고. 


안 보인다.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놀이터 앞을 서성이는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흰색 와이셔츠에 재킷? 원래 생긴 건 말짱한 놈들이 사이코 기질이 있잖아. 잘 만났다.  나한테 그렇게 반말 찍찍해대는 사연이나 물어보고, 면상에 책 던지고 돌아서야지. 


"당근이세요?"

"아, 아닌데요."


당황한 남자의 손사래가 과장되게 크다. 

아니, 이 시이끼 어딨는 거야? 집 앞에 하나밖에 없는 놀이터를 다시 눈으로 주욱 훑는다. 


그때 내 시선에 잡힌 한 남자. 그가 놀이터 앞 차에서 내리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 마. 이. 갓!


그를 본 순간 퍽,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에 정수리를 맞은 듯. 다리는 휘청이고 나가야 하는 쓰레빠는 잘 끌어지질 않았다. 


외국인이었다. 그것도 흑인.


'아, 씨. 말을 했어야지.'


한국말하는 품새를 보니, 당근 톡 할 때는 도움을 받은 듯. 정말, 한국말을 쪼금 할 줄 알았다. 난 2년 동안이나 묵혀두었던 곰팡이 나는 영어회화 실력을 꺼내어, 주어, 동사, 목적어 어순에 맞춰 말을 했다. 다른 책도 사고 싶다 해서 8,000원에 4권의 원서를 안겨줬다. 


그가 나에게 땡큐, bye라 말하며 입꼬리를 귀까지 걸며 좋아했다.

난 민망하고,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민망하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폈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1. 존댓말과 반말을 구분 못하고,

2. 번역체 말투를 쓰고,

'6시 15분에 오겠습니다.' 우리는 간다 하지, 온다 안 한다. 

3. 우리 말에서는 잘 안 쓰는 긴 수식어 표현을 썼다.

'나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앞에 있다.' 


이렇게 많은 단서를 흘렸는데, 내 머릿속 당근 고객 범주엔 외국인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껏 외국인 보기 귀한 이 도시에서는, 당근 외국인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흠.


나이를 먹을수록 머릿속에 쓸데없는 '망상' 재료만 가득하다.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대부분 틀리고.


흑.


마음공부한다고 스님 말씀 유튜브 찾아 열심히 듣고, 반야심경 암송하면 뭐 하나? 이렇게 매번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있는데. 


40도 무더위에 더 열이 나려 한다. 열나면 큰일인데. 코로나. 

나려는 열도 못 나오게 꼭꼭 눌러놓고, 다시 금강경 책을 편다. 그래도 마음 공부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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