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탄 스토리를 먼저 읽고 오시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빠릅니다.]
8시가 넘었다. 이삿짐센터는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전화 한 통 없었다. 제주도까지 1박 2일 이사를 가야 하는 우리는, 오늘 어쩌면 이사를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멘붕이 왔다. 남편과 나, 그리고 대학생 딸내미. 이사를 못 나가 이삿짐 끌어안고 길바닥에 나앉아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유일한 생물체는 우리 집에서 까뭉이 뿐이다. 고 녀석은 오늘도 장난감을 물어뜯으며 해맑게 우리를 쳐다봤다.
전화가 난리가 났다. 이삿짐센터만 빼고 모두 전화를 해댔다.
[이사 들어가기로 한 사람인데요, 오늘 안 비워주면 진짜, 큰일 나는데.]
[에어컨 중고로 산 사람인데, 트럭 빌려놓았는데 그럼 언제 가지러 가요?]
[서울로 침대 가져갈 사람인데, 언제 내려줘요?]
7시 이사 시간에 맞춰 줄줄이 트럭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삿짐센터가 전화를 해서, 이래 이래 해서 오늘 못 간다, 죄송하다, 다른 방도를 구해라. 그렇게 말했으면 에이 씨, 욕 한 사발 해대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게다. 그런데 그냥 가타부타 연락이 안 됐다.
-뚜 우우, 뚜 우우, 뚜 우우.
신호는 가는데, 전화는 안 받았다. 그게 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집 오늘 이사 나가는 것 맞슈? 끔뻑, 끔뻑. 옆집에 사는 라마가 물었다.
딸내미는 전국에 있는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돌리고 또 돌렸다. 딸내미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나에게 물었다.
"엄마, 따불 달래."
뭐? 따... 불? 그, 그럼 600만 원? 미쳤냐?
"안 한다고 해."
"알았어."
차라리, 이삿짐을 맡길 창고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집요한 성격의 남편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사태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나름 비스므레한 결론을 유출해냈다.
"이삿짐센터가 다른 곳에서 이사를 한 건 더 하고 오는 게 분명해. 이번 주가 신축 아파트 입주랑 겹쳤대."
오, 마이, 갓. 이런 정신 나간 것들, 내 다 깡그리 싸잡아 소송을 걸어버리고 말 거야.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내 이것들을. 그 말을 듣고 나니 눈에 불이 났다. 아무리 돈에 눈이 어두워도 그렇지 어떻게 이중계약을 할 수가 있냐고? 분해 씹어댄 내 아랫입술이 너덜거릴 때쯤, 이삿짐센터 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진짜.
그리고 아침 7시에 오기로 한 그들은, 오후 1시가 다되어서야 우리 아파트로 기어들어왔다. 두 번째 이삿짐을 나르려고.
고개가 빠진 다음에 나타난 우리 이삿짐센터 트럭. 실장이 아파트 문 앞에서 우리에게 허리 굽혀 90도로 절을 했다.
"아니, 진짜 이러시면 안 되지 않아요? 이게 말이 돼요? 약속했으면 제시간에 오셔야지요. 전화도 안 받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돈, 돈 때문이겠지.
알면서도 화가 났다. 내가 피해를 입었으니까. 내가 피해자니까. 씩씩대는 날 남편이 가만히 구석에 데리고 가 말했다.
"우리 오늘 저 사람들 데리고 제주까지 내려가야 해. 이제 와서 서로 얼굴 붉힌다고 우리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어. 아무 말하지 마."
남편의 뇌는 이성 90%로 채워진 게 분명해. 그런 말을 이런 상황에서 내뱉다니. 난 씩씩거리며 터져 나오는 화를 간신히 눌러 참았다.
여자 1 남자 3이라더니, 여자 2, 남자 2(차마 일꾼이라 보기 힘든 늙으신 분 1)가 와서 이삿짐 싸는 것마저 버벅댔다. 우리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이삿짐센터가 경기도를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에야, 실장 아주머니가 핸드폰에 소리를 질러댔다.
다행히 슈퍼맨같이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날아왔다. 손이 빨랐다. 박스가 눈앞에서 휙휙 날아다녔고, 그 남자분이 지나간 자리엔 텅 빈 공간이 계속 생겨났다. 말이 어눌한 외국인이었는데, 우리 마음 상했을까 봐, 계속 우리 요구조건에 맞추려고 최대한 물어보면서 이삿짐을 옮겼다.
다행히 이삿짐이 내려가고 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내 마음이 그나마 누그러진 건 그들이 앉지도 못한 채, 서서 후루룩후루룩, 자기들이 직접 시킨 짬뽕을 흡인하는 모습을 봐서이다. 남편이 그들에게 의자를 권했다. 앉아서 드시라고.
돈, 돈 때문인 거야. 돈.
난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경기도에서 출발한 이삿짐이 밖에서 대기하고 대기하다, 겨우 짐을 반쯤 비운 우리 집으로 겹치면서 밀고 들어왔다. 그쪽 이삿짐센터에서, 지연되는 직원 일당을 우리 이삿짐센터에 요구했다.
30만 원.
"아니, 우리가 왜에에에에 30만 원을 내요? 왜에에에에?"
나는 내 인생에서 그렇게 죽을 의지를 담고 소리치는 악다구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실장 아주머니가 씩씩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상대 이삿짐센터 직원이 함께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그쪽이 늦게 들어와서 이사가 늦었다면서요, 그러면 그쪽에서 책임을 지셔야지?"
"왜, 왜, 왜, 왜, 우리가 그 돈을 내냐고요?"
한 옥타브 높게 올라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파트에 울려 퍼졌다.
"아니, 그러면 누가 내요? 늦게 온 그쪽이 잘못이지."
"못 내요. 우리는 절대로 절대로 못내."
실장 아주머니에게서 오늘 30만 원을 받아가려면 아마, 살인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돈, 돈 때문인 거야. 돈.
먼저 약속한 우리를 제치고, 다른 곳에서 이사를 한탕 더 하면서도 우리 전화를 미친 척 안 받은 것도,
허리를 그렇게 깊게 숙이고 우리 집에 들어온 것도,
허겁지겁 서서 짬뽕을 입에 쑤셔 넣은 것도,
그리고 30만 원 못 낸다고 그렇게 악을 써대며 소리를 질러댄 것도.
난 피해자인데도 마음이 안 좋았다. 결국, 그 30만 원을 이전 집주인과 우리가 15만 원씩 반반 부담했다.
6시가 다되어서야 우리 이삿짐센터는 5톤 트럭을 가득 채우고 완도로 향했다. 실장 아주머니가 이삿짐을 싸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화내지 않으신 사모님, 사장님은.... 정말 처음 봐요."
내가 원래 인품이 좋아서도 물론 아니었다. 어쩌면 나도 화내는 게 나에게 아무 이득이 없다는 판단하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분이 살아온 시간과 내가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 다른 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완도에서 새벽 배를 타고 제주도에 해가 뜰 때쯤 들어왔다.
드디어, 제주도.
트럭을 타고 아침을 먹으러 나갈 수가 없어서, 남편이 차로 모두 데리고 읍내에 나가 아침을 사 먹이고 들어왔다. 그래서 그 힘센 남자분이 몽고에서 오신 3살 아이 아빠라는 것도 알았다. 마지막 잔금을 치를 때에도 그 몽고 분은 다 정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방 안에서 전선을 마저 감고 있었다.
맞다. 내가 기대했던 이사는 아니었다. 애가 탔고 입이 말랐고, 머리 뚜껑이 열렸고 속이 다 뒤집어진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일이 일어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겨우, 어찌어찌해서, 아슬아슬하게, 가까스로, 포도시 제주도 입도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