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공여사 Feb 27. 2022

신부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종교 여행 갔다, 맛있게 먹고 재밌게 놀다만 왔습니다

우연히 독서모임 팀원 중에 4명이 강진 여행을 다녀왔다. 아무 기대도 없이 갔던 그 여행이 서로의 뇌리에 깊이 박힐 만큼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여행의 맛을 잊지 못해,

 <꼬꼬행>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행'이라는 독서여행 모임까지 발족하고 말았다. 


4명의 여행에 끼지 못해 분했던 멤버 둘을 포함하여 6명으로, 매달 3만 원씩 여행 곗돈까지 부어가며.


몇 년째 독서모임을 함께 해왔으니, 그 집에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적어도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 집처럼 별 큰일이 없는 집은, 댕댕이 까뭉이 생식에 닭고기, 소고기뿐 아니라 타조, 칠면조, 말고기까지 멕이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안다.


저번 여행의 주인공은 정약용. 천주교 신자로 박해받았던 얘기에서 착안하여, 우리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행> 2탄의 주제는 <김대건 신부님>이었다.


<일단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이때까지도 꽤 진지한 순례길을 걸을 줄 알았는데.>

크게 아울러 종교까지 섭렵하기로 하고, 책도 찾아 읽고 여행 전 독서모임도 따로 가졌다. 

최근에 세례를 받은 1인, 천주교 냉담자 1인, 불교 신자 1인, 그 외 무교인 3인은 나름 바쁜 시간을 쪼개 종교 여행 준비를 했다. 


돌이켜보니 난 애초에 그다지 종교에 뜻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김대건 신부님의 삶이 너무 짧아, 생각보다 발자취를 찾는 게 어려웠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눈독을 들였던지.


어쨌든 2월 19일, 우리는 순례길이라도 떠나듯, 경건한 마음으로 충남 당진으로 떠났다. 김대건 신부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때까지도 딱히 죄송할 일은 없었는데.


근데...


다녀와서 보니 차암, 


1. 신부님, 죄송합니다. 종교 여행 떠났다가, 가마솥 모닥불 지글지글 삼겹살만 맛있게 먹고 왔습니다.


"집에 사람이 안 사니 집에 색이 없어지는 거야. 그래서 사람을 들였더니 집에 생기가 돌고 색이 돌아와."

<갈산재> 화가 할머니의 한옥 숙소에 대한 설명이었다.


웃음이 싱그러운 할머니가 모닥불을 벌겋게 때워주셨고, 항아리 깊은 곳에서 직접 담근 포기김치를 꺼내 주셨다. 우린 당진의 전통술 두견주에 지글지글 모닥불에 구워 먹는 삼겹살을 참 맛있게도 먹었다. 


"누가 2kg만 사라고 그랬어."


아쉬움에 타박까지 해가며.

<모닥불에 밤새 끓은 가마솥 물>
<모닥불에 구워 맛있었나, 같이 먹어 맛있었나>

2. 신부님, 또 죄송합니다. 종교 여행 떠났다가, 전혀 종교적이지 않는 자기 계발 이벤트에 숨넘어가게 웃고만 왔습니다. 


원래 3번째 종교 책 얘기를 해야 하는 시간인데, 아무도 그러자 얘기를 안 했다. 그러더니 서로 눈치만 보다 우린 뜬금없이 <자기 계발 이벤트>를 했다. 앞으로 1년 동안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뽑아 실천하자는 거였다.


"굴삭기 면허 운전하기,

해녀복 입고 제주바다 체험하기,

사격해보기,

턱걸이 7개 성공하기,

영어 자막 없이 한 편의 영화 보기.. 등등"


우린 뭐가 우스운지 웃고 또 웃었다. 


죄송합니다. 


종교 얘기하면서 기도를 하든, 묵주를 돌리든, 목탁 두드리고 염불을 하든 했어야 했는데, 더 나은 자기가 되고 싶은 욕망에 세속적인 목표를 하나씩 더 간직하고 말았습니다.

<1년 안에 이루고 싶은 목표 뽑기>

3. 신부님, 거듭 죄송합니다종교 여행 떠났다가, 박해받고 힘든 시간 보냈을 성인들과 달리, 뜨거운 온돌에 궁뎅이 지지며 편하게 자고 왔습니다. 


밖은 추웠다. 오지게 바람이 찼다. 그런데 온돌방은 어찌나 뜨겁게 타오르는지, 바닥에 그을음 자국까지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옷 타는 냄새가, 조금 있으면 살 타는 냄새도 날 것 같았다. 우린 1분도 견디지 못해 이불 위로 베개 위로 피신을 했다. 

<우리가 1박 한 충남 당진 갈산재>
<궁뎅이 뜨듯하게 지졌던 뜨거운 온돌

깨끗한 이부자리에 두툼한 토퍼 위로 올라오는 온돌의 온기 덕분에 숙면을 취했다. 


죄송합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온갖 고문을 다 당한 성인들의 성지를 방문하고,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편안하게 지내면서 성스러운 종교인의 삶을 체험했어야 했는데.... 잘 먹고 뜨뜻한 이부자리에서 자고 나니 좋기만 했습니다. 



<미리내 성지에서>

고해성사 뒤에 붙여.


신부님, 


신부님 찾아뵈러 가서 성스러운 생각은 많이 못했지만, 저흰 즐겁고 재밌게 놀다 왔습니다. 

힘든 세상, 제각기 어려운 일 견디며 살아가는데, 이런 좋은 사람들 만나게 해 주신 거 감사드립니다.

순수하게 만나 책 얘기도 나누고, 아프다면 등도 토닥거려주고, 힘들다면 커피 쿠폰도 쏴주면서 저흰 잘 지냅니다.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봅니다. 이런 복된 사람들을 만나 이렇게 멋진 시간을 또 보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부디 용서해주세요. 아멘입니다.


다음 여행지는 속인이 짊어지고 가기에 너무 무거운 주제만은 피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전 제 수준에 맞게 

뭐, 한옥이나 술이나.

그런 거로 제안해볼 생각입니다.


그건 좀 잘할 자신이 있네요.

<솔뫼 성지에 누군가가 모아두었던 솔방울 하트, 결국 사랑이라는 생각엔 변함없습니다>


<이 여행은 코로나 19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이사하는 날, 이삿짐센터가   안 나타나면 생기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