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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May 07. 2022

우리 동네 울뜯이와 과묵이

제주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

제주 와서 산 지 6개월이 넘었다. 육지에서 섬으로, 도시에서 깡시골로, 아파트에서 단독으로.

뭐, 이 정도면 엄청난 환경의 변화다. 


우리가 제주로 이사 가기로 했다는 말에, 친구가 말했다. 


"참, 쉽게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결정이네요."


뭐, 북한으로 넘어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뭔 용기까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가벼운 변화, 아닌 것 맞다.


가장 큰 변화는 주위에 사람이 없다. 내가 사는 동네가 유난히 제주스러운 곳이라 그런지 주위를 둘러봐도 360도 파노라믹 밭 뷰가 하염없이 펼쳐져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진중히 앉아 함께 얘기할 이웃을 단 한 명도 못 사귀었다. 어차피 나이 들면 그런 진중한 친구를 사귄다는 게 어렵긴 하지만. 그 대신 동네 개들과는 안면을 모두 트고 서로(?) 친하게 지낸다.  


매일 하루에 두 번 까뭉이 데리고 동네 산책을 다니니, 동네 개들도 급 관심을 보인다. 주로 짖는다. 이름이라도 알면 더 친해질 것 같은데, 물어볼 주인은 보이질 않는다. 동네에 개들이 많다 보니 남편과의 대화가 참 어수선해졌다.  


"거기 거 어디냐, 게스트하우스 뒤편에 묶여있는 진돗갠지 백군지 똥갠지, 걔 있잖아."

"어디 게스트하우스?"

"왜 담벼락 높고, 하얀 건물 있잖아."

"자전거 세워 놓은 데?"

"응. 거기."

"그래 거기 그 개가 왜?"


뉘 집 갠지 구분할 때쯤 되면, 지쳐서 더 얘기할 에너지가 딸린다. 동네 개들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남편과 내가 이름을 다 알아서 지었다. 

'울뜯이'다.

'울뜯이'


울뜯이는 게스트하우스 한 구석에 묶여있는 똥개 비스무레한 개다. 우리 까뭉이가 가까이 가서 마구 짖으면, 자기도 마구 짖으면서 분한 마음에 철로 된 울타리를 마구 물어뜯는다. 그래서 '울뜯이'다.


자세히 보니, 그 옆에 나무로 된 자기 집 지붕도 반은 이미 뜯어먹었다. 아무래도 묶여있다 보니 자유롭게 지나다니는 개들에게 질투와 시샘이 났던지, 마음속에 화가 많이 쌓여있다. 요즘은 그래서 까뭉이를 많이 자제시킨다. 울뜯이의 치아가 심히 걱정돼서 말이다. 


······미안해, 울뜯아.

늠름한 '과묵이'다.

'과묵이'


두 번째 친구는 과묵이다. 양파밭과 비트 밭을 지나 몇 집 모여사는 작은 동네에 들어서면, 낮은 돌담 너머에 과묵이가 있다. 무슨 종인지 꽤 족보 있는 개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아무 소리를 안 낸다.


대부분 제주 개들은 엄청 짖는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미리 마음을 굳게 먹지 않고 그 옆을 지나갔다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그동안 오래 쌓아왔다 자랑하던 교양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내 입에서는 씹어 뱉은 욕이 나도 모르게 마구 발사된다. 


근데 과묵이는 아무 소리를 안 낸다. 


할머니 혼자 키우시는 것 같은데, 짖으면 할머니에게 혼이 나서 그런가? 그렇다고 목소리를 못 내는 건 아니다. (바람결에 낮은 목소리로 컹컹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스스로 자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아이 이름은 '과묵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낮은 돌담 너머 과묵이를 보고 내가 인사를 건넨다. 


"안녕, 과묵아?"

"······."


역시 과묵하다. 6개월 내내 아는 체를 했더니, 과묵이는 우릴 꽤 친숙하게 느끼나보다. 우리가 부르면 벌떡 일어나 꼬리까지 흔든다. 

'구박이'다.

'구박이'


세 번째 친구는, 뭍에서 와서 전원주택 예쁘게 짓고 사는 집의 백구다.  전원주택은 그림처럼 예쁘고, 잔디도 푸르른데. 근데 '구박이'는 울타리 안에 살지 못한다. 울타리 밖, 소나무 아래 개집에서 산다. 대부분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거나, 지나가는 우리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아주 가끔 꿈에 떡 본 듯 개집이 비어있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뭍에서 내려온 20대 딸이 구박이를 산책시키는 듯하다. 그래서  '구박이'다.


어느 날, 산책 나갔다 텃밭을 가꾸는 구박이 주인아주머니에게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근데 개 이름이 뭐예요?"

"광복이요."

"광복이요?"

내가 놀라 되묻는다. 

"쟤가 우리 집 들어온 날이 8월 15일이었거든."


흐음. 내 예상과는 달리 꽤 멋진 이름을 가졌다.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은' 광복이라니.  


인간들이 보기엔 광복이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만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빼앗긴 견권을 찾기 위해' 밤마다 몽매한 인간들에게 뿌릴 전단지를 등사기에 밀고 있거나,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뽑느라 동네 개들과 비밀스럽게 회합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상상은 여기까지만.


이래서, 뭍에서 살던 사람들이 제주에 내려와 살면, 뭍에서 안 하던 예술이 마구 하고 싶어지나 보다. 유채꽃과 동백꽃에 관해 시를 쓰고, 제주 바다를 그리고 한라산을 판화에 새긴다.


한마디로 복잡한 인간사는 멀어지고 사람이 단순해지는 거지. 6개월 동안 동네 개들 이름만 짓고 돌아다니는 나를 봐도 그건 맞는 말이다.

…… 좋은 거겠지?

미친 건 아니고.

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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