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집에서의 하룻밤
얼마 전 <시도집>에 하룻밤 머물렀습니다. <시도집>은 부산에 있는 숙박 공간으로 1955년 세워진 목조 주택을 개조한 곳입니다. 호스트의 취향과 생각이 아기자기하게 잘 녹아있는 있는 <시도집>에서의 생각을 정리해두려고 합니다.
<시도집> 공간은 평소에 우리가 가진 감각을 편안하게 진정시켜준다는 점에서 무척 즐거운 곳이었어요. 집의 중앙에 있는 '데스크 룸'에 가방을 놓아두면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책과 블루투스 스피커였죠. 책 제목은 '내면의 평화를 위한 음악 Music For Inner Peace'. 책날개에 있는 QR코드를 활용해 박정용 선곡가님의 플레이리스트를 어려움 없이 틀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글쓰기를 위한 노래들을 모으고 있다 보니 반가운 노래도 있었고, 한 곡만 두고 오래도록 반복해서 들을 만큼 신선한 곡도 있었습니다.
노래를 틀어둔 채로 <시도집>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데스크 룸과 다락 등 다양한 장소에 준비된 메시지 카드와 책, 곳곳에 배치된 아트 포스터와 신중하게 고른 제품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시도집>을 만든 호스트가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마음으로 이 공간을 준비했는지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상대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는 공간에 들어선 신선한 기분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마루 위르 걷고, 읽고, 들춰보았습니다. 하룻밤을 묵을 수 있게 된 데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밥을 먹고 조금있다가 다시 봐야지.'
<시도집>에 오기 전에 어떤 기록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몇 일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다가 이유 없이 그동안 미루었던 지난 여행 일기를 마저 쓰고, 여행 사진과 글을 담은 책 디자인 작업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숙소 중앙 '데스크 룸'에는 대략 6-8명이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크고 넓은 테이블과 너무 밝지 않은 은은한 조명이 준비되어있습니다. 집이 아닌 곳에서 기록자를 저를 위해 딱 맞는 방을 만난 것이 얼마만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효율을 따져야하는 일반적인 카페나 숙소에서는 이런 식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으니까요. 작은 필기구와 종이와 노트를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는 책상과 호스트가 마련해둔 작은 서재, 글을 쓰다가 답답하면 잠깐 나와볼 수 있는 마당까지.
저는 데스크 룸에서 이른 밤에 틀어둔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새벽 늦도록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그맣게 들려오는 음악 외에는 한 점의 소음도 방해도 없었습니다. '이런 단순한 경험이 요즘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매일 온갖 스크린과 서비스와 편의를 이용하면서 효과음과 광고에 시달리고 있고, 떠올려보면 누가 거들지도 않았는데도 작은 지루함도 견디지를 못해서 자발적인 산만함으로 괴로울 때가 많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시도집>에서 만난 오랜만의 몰입은 진심으로 반가웠어요. 습관이 된 기록마저도 평소처럼 조급함 없이 여유를 두고 매듭지을 수 있었거든요. 좋아하는 펜으로 노트에 조금 적기도 하고, 가져온 노트북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거나 책 디자인 작업으로 머리를 굴리기도 했습니다.
잠들기 전에는 <시도집> 공간에서 제공하는 '시도집 페이퍼'를 작성했습니다. 시도집 페이퍼는 공간에 머무는 사람에게 다정한 질문 던지는 양식 종이입니다. 먹지로 제작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자와 공간 호스트 양쪽이 나눠가질 수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그 중에 인상깊은 질문은 이곳에서 얻은 영감이나 일상으로 돌아가서 시도해보고 싶은 것에 관해 것이었습니다. 음악이나 차, 책과 같은 취향에 관한 가벼운 시도부터 영감과 용기를 전해주는 다짐까지.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멋진 식사를 끝내고 기분 좋은 회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도집>에 발을 들이고 나서 나갈 때까지 '시도'라는 키워드와 그에 담긴 메시지가 부드럽게 전해졌습니다. 코로나로 얼어붙은 생활에 오랜 만에 예술적인 시간을 불어넣을 수 있었습니다.
<시도집>에서의 기록을 정리하며 제 마음 속을 메우고 있는 소란스러운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감정이나 계획 속에서 단단하게 기록자를 붙잡아주는 장소를 떠올렸습니다.
시도집에서의 시간을 제안해준 J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