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읍내 사거리에는 '문화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낡은 문구점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그곳은 새 학기에 필요한 문구를 구입하려는 아이들의 재재거림으로 분주했다. 그 시절 읍내의 단출한 풍경에 질린 친구들은 보다 볼 것이 많은 호기심의 시내로 모험을 떠나곤 했다. 그들은 시내 중앙로에 위치한 아트박스나 LNC(뜻을 알 수 없지만 디자인 소품점)의 존재를 비밀스레 알려주었다. 물론, 대부분의 읍내 아이들은 여전히 사거리 문화당을 애용하며 부족한 학용품, 준비물, 미술 교구 등을 공수하는 쪽을 택했지만.
문화당의 강화유리로 된 출입문을 열면, 유리문에 달린 조그만 종이 환영한다는 듯 먼저 '딸랑' 소리를 내며 반겼다. 우리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할아버지! 도화지 있어요? 물감은요? 전 사인펜이 필요한대요'하며 재재거렸고, 느릿느릿하면서도 특유의 따스함을 가진 백발성성한 문화당 할아버지는 '오이야, 그게 어디 있을까? 바로 여기에 있지'하며 좁다란 내부를 유연한 구렁이처럼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을 금세 찾아주시곤 했다. 물론, 미로처럼 펼쳐진 작디작은 문구의 세계에서 우리는 기꺼이 길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읍내의 유일무이한 문화당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물론 그 시절 역시 한 때였지만.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그해 11월 우리는 가을 학예회 행사 중 하나로 '개인문집 전시회'를 준비 중이었다. 교지 편집부가 주축이 되었는데, 나 역시 1학년에서 선발된 편집부원의 한 사람으로 행사 준비를 도왔다. 개인 문집은 학년별 국어 시간에서 파생된 과외 활동 중 하나였는데, 학기초부터 작성해온 개인 문집을 전교생을 대상으로 캔버스처럼 전시한다고 했다. 개인 문집에는 학생들 저마다의 취향을 반영한 결과물이 담겨 있었다. 책에서 발췌한 아포리즘과 같은 짧은 문구, 일기와 편지, 시와 노랫말, 숙제의 일부인 수필과 독후감의 기록들이 빼곡하게.
나 역시 현재의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닮은 개인 문집 꾸미기를 좋아하던 학생 중 하나였다. 그곳에 아주 자주 윤동주나 김소월의 시가 등장했다. 시 필사가 지겨울 때는 가수 이소라의 노랫말을 적곤 했다. 그뿐인가. 시골 문화당까지 점령한 1세대 아이돌인 H.O.T의 엽서를 사서(애석하게도 브로마이드를 살 돈은 없었다) 강타 오빠의 얼굴만 정교하게 오려 붙이며 aka. 칠현부인으로서의 소명을 열성적으로 뽐내곤 했다. 또한 당시 도시 여성의 표본이자 아이콘으로 느낀 쇼트커트, 화려한 아우라를 장착한 배우 이승연 엽서 뒤편에 '언니는 저의 롤모델이에요'와 같은 문구를 써 내려가며 개인 문집의 몸집을 늘려나갔다. 결과적으로 문집은 일관성 없는 중구난방의 콘텐츠로 점철되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 역시 할수만 있다면 되돌려 받고 싶은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나만의 치기 어린 기록과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그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채. 안타깝게도 개인 문집의 실물 추억은 거기 까지다. 문집은 서울로 올라오면서 몇 번의 이사 끝에 결국 잃어버리고야 말았으니까.
좌. 절취선이 있어 뜯기 용이한 면지. 우. 두 개의 버튼이 단단하게 노트를 감싸 안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새것 같은 넘김이 가능하다. @류예지
다행이라면, 개인 문집 전시회 방명록으로 구입한 모닝 글로리 노트북은 남아 있다는 것. 이 노트북 역시 문화당 노트 매대를 열심히 뒤지다가 발견했다. 영단어 암기용으로 구매한 이 수첩은 다홍빛의 유연하지만 단단한 플라스틱 커버, 100장의 적당한 볼륨, 타공 한 후 압착한 두 개의 단단한 버튼으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교복 재킷 주머니에 휴대하기 용이한 사이즈일 뿐만 아니라 글줄 간격도 7mm로 적당해, 무람없이 기록한 후 수시 때때로 펼쳐보기에 좋았다. 게릴라성으로 쪽지 시험을 치렀던 영어 선생님을 만나 뻔질나게 단어를 암기해야 했던 나는, 쉬는 시간이나 등하교하는 버스 안에서 틈틈이 영단어를 들춰볼 노트가 필요했다. 물론, 이 암기의 기록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공부를 아주 못하는 것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지만, 뜻모를 바람을 품었던 것 같다. 암기용 수첩을 들여다보느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를 놓치기는 싫다고. 인생은 한 번 뿐이라고.
개인 문집 전시회는 이맘때쯤 열려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전시회 전날, 방명록 노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 노트를 구입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등굣길, 노트 앞쪽에 영단어가 적힌 부분을 과감히 찢어버리고 방명록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 이는 노트 면지의 상단에 절취선이 있어 가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절취선이 있는 줄 노트를 좋아한다.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방명록 노트. @류예지
개인 문집의 제목은 '희망'이었는데, 방명록 노트 역시 문집의 이름을 따라 '희망'이 되었다. 희망으로 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공부보다는 글쓰기를 좋아했던 열네 살의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보다는 희망을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희망의 기록을 개인 문집에나마 하나씩 하나씩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그저 익명으로 남은 사람도...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된다. @류예지
이 주에 걸쳐 진행된 개인 문집 전시가 끝나고 난 후, 문집과 방명록을 돌려받았을 때 나는 한 권의 책을 선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정을 갖고 차곡차곡 기록해온 개인 문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담긴 노트는 언제든 펼쳐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록물로 돌아왔기에. 방명록 노트마저 분실했다면, 진작 휘발되었을지도 모를 개인 문집에 대한 편린들은 노트를 펼쳐볼 때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어쩔 수 없는 망각을 단번에 복원한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집의 부록으로 여겼던 평범한 한 권의 노트가 오랜 시간이 흘러 추억의 서랍 속에 잠자고 있던 나의 열네 살을 호명해준 감사한 오브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쉽게 뜯어 쓸 수 있는 기능이 있었음에도, 어쩐지 쉽게 뜯어질 수 없는 한 장 한 장의 선명한 기억을 선물해준 이 노트를, 나는 지금도 여전히 부재한 문집을 대신해 계속해서 펼쳐 읽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