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장(文寶藏). 문보장은 교보문고의 문구 코너인 핫트랙스의 옛 이름이다. 소비자로서 교보문고가 자사 문구 코너의 이름을 핫 트랙스로 변경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구의 보물 창고' 혹은 '도심 속 문구 아지트'를 의미하는 '문보장'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두고, 왜 핫 트랙스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일까?
각설하고 '문보장'의 팝업 스토어를 다녀온 것은 지난가을의 일이었다. 성수동 비마이비의 전용 공간에서 진행된 해당 팝업 스토어에는 문구 덕후, 문구에 진심인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만한 친숙한 문구 관련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단, 입점된 문구 브랜드의 상품들 면면히 구경하는 즐거움이 컸던
그곳에서 나는 꽤 긴 시간을 머물러 있었다. 이왕 먼 곳까지 간 김에 다이어리 꾸미기(이름하여 '다꾸')와 필사 체험만큼은 여유롭게 하고 싶었다.
다꾸 꾸미기 체험존은 소비자로 하여금 다이어리를 마치 릴레이 방명록처럼 활용하게끔 해놓았다. 전시된 문구류 중 펜과 포스트잇, 스티커를 활용해 짧은 메모를 남기고 돌아왔다. 필사 존은 교보문고의 정체성을 문구와 결합한 시도가 돋보였다. 바로 비치된 책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을 선택해 메모지형 노트에 필사를 한 후 (뜯어서) 인증하는 방식이 그랬다. 나는 나태주 시인의 시 한 편을 필사한 후 인증했다.
팝업 스토어를 나오기 전,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간다'의 심정으로 입점된 문구 브랜드 매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랜 고심 끝에 소소문구의 디깅 노트와 웬아이워즈영의 만년형 다이어리 총 2종을 구입했다. 소수문구의 디깅 노트는 소비자가 선호하는 품목이나 영역에 깊게 파고드는 '디깅(digging)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에서 따온 이름인 듯 보였다.
좌. 문보장 팝업 스토어를 알리던 간판. 우. 다꾸 체험 존에서 발견한 한 소비자의 넋두리가 귀여워서 찍었다. @류예지
필사 체험 존에서 필사한 나태주 시인의 '오직 너는'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 @류예지
소소문구의 디깅 노트는 A5 크기의 핸디 한 판형의 노트였다. 마감력을 높인 PU 재질의 커버와 필기감이 좋은 그리드형의 부드러운 면지가 특히 마음에 들었지만, 실제적으로 나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킨 건 이 부분이었다. 바로 뜯으면 노트 받침대로 쓸 수 있는 패키징 구조. 누구나 그런 건은 아니겠지만 나는 노트를 구입할 때 이왕이면 기존의 노트와 차별화된 '특이점'이 있는 지를 살펴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당장 노트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이 특이점을 가진 노트를 반드시 쓸 일이 생길 것이다'라는 (나름 거시적인) 연결점을 갖고 노트를 구매하는 것. 구입한 디깅 노트 역시 그런 생각으로 구입해 서랍장에 얌전히 모셔 두었다. 그렇게 팝업 스토어를 다녀온 후 어영부영 한 달이 흘렀고, 드디어 디깅 노트를 활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포항에는 '지금책방'이라는 로컬 책방이 있다. 이 공간에서는 다양한 세대와 함께 하는 책 읽기 모임, 대표 님이 직접 큐레이션 한 책을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책 배송 프로그램, 포항의 두 로컬(지금책방, B급취향) 책방 지기가 함께 발행하는 '주간쌍연'이라는 이름의 메일링 서비스, '지금방情'이라는 온라인 필사 모임을 운영 중이다. 이걸 대표님 한 사람이 직원도 두지 않고 홀로 운영하고 있는 셈! 그러니 로컬 책방을 방문할 분들이시여! 제발, 빈 손으로 나오지 마시길.
이 중에서 '지금방情'은 50일 동안 이뤄지는 온라인 필사 인증 모임인데, 11월 중순쯤 책방 대표님께 8회차 모임에 '초대 작가'로 참여해 줄 수 있겠냐는 연락을 해오신 것. 지금책방과의 인연은 이년 남짓 되었다. 첫 번째 에세이집인 <어떤, 소라>와 두 번째 에세이집인 <이름 지어 주고 싶은 날들이 있다>의 입고처로, 전국 책방들과 두루 교류하시는 두 출판사 대표 님의 영업력 덕분이었다. 지금책방 대표 님을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sns로 꾸준히 소통해 오던 중이었는데, 문보장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지금방정'의 초대 작가로 함께 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기간은 12월 1일부터 1월 19일까지로 총 50일이었고,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기에 실행력이 받쳐주지 않는 이상, 당장의 의욕만으로는 수락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되기 위해 버텼던 시간이 100일이었던가?
그 절반에 해당하는 50일을 쉼 없이 필사를 하고 인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은 '현실적인 걱정'에 처음에는 고사할까도 했지만, 이 모든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일 뿐이라는 마음으로 과감히 수락했다.
연말연초를 '연말이니까, 연초라서'라는 핑계로 정신없이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조금' 특별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싶은 마음,
그것을 즐거운 행위로 승화시켜줄 소소문구의 디깅 노트와
그간 쌓아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있으니 즐기듯 이 일을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 소소문구의 디깅 노트. 우. 절취 가능한 패키징에서 따로 분리한 책받침. 필사를 하는 동안 이 책받침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류예지
필사하기 전 날 진행된 오리엔테이션 시간, 나는 회원 분들과 인사를 나눈 후 최근 필사하기 좋은 노트를 구매했다며 소소문구 디깅 노트 사진을 전송했다. 패키징을 열어 (절취선으로 이루어진) 책받침 부분을 조심조심 뜯어냈다. 절취된 책받침은 내구성이 있어, 필사를 할 때 종이의 끝부분에서 필연적으로 들뜨고야 마는 손바닥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초등학생 시절, 자주 사용했던 추억 속 책받침도 생각났다. 무엇보다 하나의 요소를 더함으로써 필사하기 용이한 고민을 섬세하게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이 노트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좌. 필사 1일 차 <명랑한 운둔자>/우. 필사 50일 차 <어른이 슬프게 걸을 때도 있지>의 한 부분. 1일 차와는 달리 서로를 향한 다정한 응원이 듬뿍 묻어나 있다. @류예지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5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필사를 했다는 것이다(물론 쉽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나누고 싶은 책을 읽고 함께 필사를 하는 일, 필사분을 인증한 후 사람들과 함께 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다 보면 눈깜짝할 새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필사를 하는 동안, 내 안의 '성장판'을 한 줄 더 늘여가는 기분이었다. 소소문구의 디깅 노트는 더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고.
마치, 노트의 '줄'이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중한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