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내 인생의 붉은 혁명을 찾아서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흐린 날, 나는 포르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우산이 처참히 망가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친 날씨 속에서, 니콜이 포르투로 돌아왔다. 니콜은 리스본에서 함께 여행한 독일인 친구와 포르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알게 된 호스텔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앤디가 좋아하는 바에서 저녁 8시에 만났다. 우산으로 비를 막을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온몸으로 비를 헤쳐나가며 그곳에 도착했다. 이런 나를 보고, 니콜은 우비를 두 개 갖고 있다며 예쁜 고양이 무늬가 새겨진 우비를 나에게 주었다.
앤디는 영국에 있던 집을 팔고 포르투에 집을 샀다. 무엇을 하고 살지는 생각 중이라 했다. 앤디는 자기 나라의 교육 시스템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맨체스터의 경우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 확연히 갈리는데 자신은 중간 즈음이라 어중간했다고 했다. 형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자리를 잘 잡았나본데, 앤디는 상대적으로 실패자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과 스포츠를 좋아하고 따뜻한 인상을 지닌 앤디는 자신의 단골 바에서 우리에게 와인도 사주고 연어 샌드위치도 사주는 등 후하게 베풀었다.
미국 위스콘신 출신의 그레이엄의 첫인상은 젊은 시인 같았다. 길고 짙은 갈색 속눈썹을 내리깔고, 시끄러운 바에서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조용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했다. 웃을 때도 크고 호탕하게 웃기보다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소년처럼 맑게 웃었다. 8월부터 포르투에 살기 시작한 그는, 호스텔에서 묵고 있는데 저렴한 월세의 아파트를 찾고 있었다. 일자리도 찾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철학을 전공하다 스페인 전공으로 옮겨 학사를 마친 후 여러 가지 경험을 쌓다가 지금은 포르투갈에서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다.
“미국이 싫어서.” 여리고 고요한 인상에 비해 놀랍도록 단호하고 직선적인 답이 돌아왔다. “미국 문화도 싫고, 사람들 분위기도 싫고, 역사도 없어서 싫어.” 미국이란 나라를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외향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마케팅해야 살아남을 것 같은 모습이 미국이었다.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레이엄 같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 다른 나라도 있는데 왜 포르투갈을 선택했어?” 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어는 상대적으로 쉽게 배울 수 있었어. 스페인도 좋긴 했지만, 나한테는 포르투갈이 더 잘 맞았어. 작년에 나흘 동안 포르투에 머물렀는데, 이곳이라면 내가 살고 싶은 곳이라 생각했어.” 어떤 면이 그를 매혹했는지 다시 물었다. “Caring people."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었다. 그 외에도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역사성과 예술성을 고루 간직한 건축물들을 꼽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서로 돌보아주는 사람들의 관계성을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꼽았다. “사실 나도 그걸 느꼈어!” 하며 내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했다.
“어느 날, 포르투 게스트하우스 근처에서 버스를 탔는데 버스카드를 충전해놓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표를 사고 있는데, 맨 앞좌석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허리를 숙이고 팔을 쭉 뻗어 내 팔을 잡았어. 난 처음에 그게 어떤 행동인지 몰랐어. 버스는 높이가 낮았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던 데다, 큰 도로도 아니어서 위험하지도 않았어. 그런데도 내가 돈을 내고 표를 사고 잔돈을 받을 때까지 할아버지는 내내 내 팔을 붙들어 내가 혹시나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줬어. 그다음 날, 버스에서 어떤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은 또 다른 할머니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팔이나 다리를 붙들어주는 걸 보고, 여긴 이런 문화라는 걸 알게 됐어.”
“바로 그거야!” 앳되어 보이지만 점잖고 배려심 깊은 그레이엄은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특히 아이들을 잘 돌보는데, 다른 집 아이들도 자기 아이들처럼 돌봐주는 게 인상적이야. 서로 별로 경계가 없어.” 그는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 표정이 언제나 여유롭고, 친절하고, 잘 웃어.”
이 비슷한 이야기를 리스본 호스텔에서 한 60대 캐나다 남성에게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자주 가는 리스본의 한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선 아침 10시 정도가 되면 어김없이 몇 명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종교적 모임이냐고 물으니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모여 안부를 나누고 그날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할머니가 자기보다 어린 여성의 손을 꼭 잡고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집중하는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다고 했다.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여행을 하며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결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 사람의 삶의 성숙도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매몰된 삶, 성찰하는 삶, 그리고 현존하는 삶. 아마도 이들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그리고 현재를 누리는 현존하는 삶을 제일로 꿈꾸는 이들인지도 모르겠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행 오기 얼마 전 졸업 이후 처음 만난 동창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아버지 사업이 기운 이후, 자신이 살던 강남에서 가장 집값이 높은 곳을 떠나야 했는데, 돈을 열심히 벌어 다시 자기 힘으로 그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얼마나 스스로 대견스러웠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최근까지 살던 곳과 지금 살게 된 곳의 수준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를 이야기했다. 수준 차이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우리 안에 내면화된 그런 수많은 외적 기준의 가치가 사람들로 서로 함께하지 못하게 하고,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게 아닐까. ‘더 나은 것’을 가지고, ‘더 나은 곳’으로 옮기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은 진짜 행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그럴듯한 모습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돈에 그토록 연연하는 것도 지금 당장 먹을 밥이 없기보다는 나중에 밥을 못 먹게 될까봐, 아니 나중에 풍족한 삶을 누리지 못할까봐, 남들보다 누리지 못할까봐 염려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서 지금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
이런 불안과 염려와 외적 기준을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들이대기 때문에 그 기준은 ‘나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 ‘우리의 것’을 떠나고 싶어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곳의 기준과는 달라 보이는 곳,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곳에 가서 자신이 알던 기준으로 판단(judgement)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알던 문화 속에서 살더라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길. 떠남이 꼭 ‘물리적인 떠남’이 아니어도, 내가 멀리하고자 하는 ‘문화로부터의 떠남’이 되는 길. 그 길을 모색하고 싶다고. 내 집으로 돌아가 추구할 ‘떠남’은 바로 이런 떠남일 것이다. 그리고 그 떠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내 주변엔 꽤 되니,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레이엄은 나에게 포르투에서 그린 자신의 스케치들을 보여주었다. 기술적으로 화려한 기교가 묻어난 그림이 아닌, 그만의 감성과 개성이 담긴 아름다운 스케치였다. 그가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그가 무엇에 자연스럽게 끌리는지, 그림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계속해서 그릴 수 있게 되길....그가, 그리고 내가, 각자 자신의 인생 속에서 그런 그림들을 계속 그릴 수 있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