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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퓨링 Nov 01. 2018

9월의 지하철 잡상

나는 어느 역을 지날 때 가장 많은 생각을 할까?

*<N월의 지하철 잡상>.  시골쥐인 내가 도시쥐로 진화했다는 증거 중 하나는, 이제 지하철 이동시간 30분 정도면 전혀 먼 거리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간 얼마나 지하철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가.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날아다녔던가. <지하철 잡상>은 풀풀 날리던 그 생각들을 조금씩 주워 담은 흔적이다. 자의식 과잉일까? 나는 휘발되는 나의 생각들이 참 아쉽게 느껴진다. 



 0901

#을지로 3가_잡상

 

확실히 예전보다 나는 화도 덜 내고 짜증도 줄었고 한숨도 덜 쉬고 차에 치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덜 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멘탈이 강해 져서라기보다는 외부환경이 나를 상당히 돕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다 네 맘먹기에 달렸다는 조언(이자 폭언)은 다 기만이야! 내 마음이나 의지 노오오오력을 탓하기보단 거지 같은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난 항상 더 나았거든,, 그리고 역경을 극복하면 강해진다는 그 말들도, 정말 극복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지 당장 힘든 상황의 한가운데 있으면 강해지기는 커녕 얼마나 좀스러워진다고,,, 여하튼 그래서 요즘 나쁘지 않게 살아가는데 나를 도와주는 주변 사람들이 참 고맙다. 나도 적어도 남들의 평온에 누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인데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0905

#시청역_잡상


저번 주에 생긴 궁금증인데 왜 구슬아이스크림의 가격은 옛날에 비해 크게 오르지 않았을까? 예전에 백화점에 가면 꼭 있던 구슬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 치고 꽤 비싸서 엄마가 잘 안 사줬던 거 같은데,,, 요즘 한 2000-2500원이면 한 컵 사는데 예전에도 이 정도 가격이지 않았나..? 헐 그래서 방금 찾아보니까 10년 전에도 2500원이었어!!; 그때보다 공급량이 많아졌나?... 희소가치가 좀 떨어진 것 같기도? 여하튼 그래서 요즘엔 내가 내 돈 주고 구슬아이스크림 사 먹음 언제 먹어도 꿀맛 이양


0909

#한성대입구_잡상


비장함도 적당히. 오늘 만난 도현이는 비장함으로 무장되어 있던 몇 년 전쯤 해야 하는 일 이외의 것들은 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버렸었다고 했다. 사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쓸데없지만 사고 싶은 것도 사고 타인과 실없는 농담을 하는 것 모두 중요치 않은 일들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도현이는 앞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때의 비장함이 100이었다면 이제는 그때에 비해 1밖에 남아있지 않다고도 말했다. 어쨌든 100까지나 갔었다니 걔는 좀 대단하고 멋진 구석이 있다. 하지만 걔랑은 달리 사실 나는 굉장히 게으르며 틈만 나면 쉬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장함이 그것을 압도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최근 일 년 사이에 갑자기 비장 해질락 말락 했던 것도 같은데 그럴 때마다 에구구 하고 쿨하게 쪼그려졌다(?) 콩벌레 같기도 하고.. 그래 적당히 비장한 콩벌레가 되자. 적비콩!


0910

#혜화역_잡상


새벽에 카톡으로 한참 친구들과 떠드는데, 보통은 ㅋㅋㅋ로 가득 찬 단톡 방이 가족 이야기가 나오니 ㅠㅠㅠ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오빠, 나 그 넷의 관계에서 착하고 모나지 않은 딸의 포지션을 자연스레 잡게 된 이야기부터, 왜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의 칭찬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어떤 경험들이 몸에 각인되었는 지를 공유하는 시간. 꽤 오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잔 탓인지 악몽을 꿔서 아침에 엉엉 울면서 깨버렸다. 그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니 그들 중 한 명인 세희가 ‘앞으로 저녁에는 좋은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다른 애도 그러자고 맞장구를 쳤다. 혹시 우리들 중 한 명이 괴팍한 꿈을 꿀 수도 있으니 밤에는 행복한 말만 하자는 둘의 위로가 너무도 충만해서 다시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오후 1시의 길 한복판이었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았다. 처음 단톡 방을 만들었을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자고 했다. 확실히 친구들은 돌봄의 약속을 지켜주고 있다. 능숙하고 어른스럽다. 나도 단박에 그래지고 싶지만 이 둘의 위로 능력은 내 생각에 탁월한 수준이기 때문에 따라가려면 엄청난 수련과 연마가 필요할 것 같다,,!


0920

#을지로입구역_잡상

웬만하면 무게 잡힌 생각들을 하기 싫다. 그냥 가볍고 실없는 농담 같은 것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사실 공부도 하기 싫다. 졸업장을 따려고 듣는 수업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냥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가능한 안 하고 싶다. 적당히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만큼만 책을 읽으면서 살고 싶다. 나를 화나게 하는 그런 것들만 없으면 정말 다 관둘 수 있을 텐데! 화나게 하는 것들을 물리치려면 보통 똑똑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잔인한 지점인 것이다. 분노가 배움의 연료라니.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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