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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퓨링 Nov 09. 2018

2018 넥스트 저널리즘 스쿨 후기

우리만큼 미디어에 관심 있는 조무래기들도 없을 거야...

무(無)에서 유(有)로.


“청년미디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아. 그 말은 확실히 단어 자체에서 오는 ‘멋짐’ 같은 게 있었다. 미스핏츠를 구독했고, 닷페이스를 동경했다. 이런 건 어떤 사람들이 만드는 건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뉴미디어라는 접점으로 모인 사람들은 너무도 멋진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 같았다. 이것이 처음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다. 그저 그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 사이에 끼고 싶었다.


아아, 어떻게 하면 저를 껴주실 건가요오… 우리나라에는 깍두기라는 좋은 전통도 있는데…


결론적으로 느낀 것은 그들은 무엇이든 ‘자처’해서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자처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고, 블로그를 열었다. 지금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글들이지만 부딪혀야 산산조각이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혼자만 하는 생각들이 조금 아깝게 느껴져서 내 생각을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찾았다. 작년 여름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우리를 도와줄 회사를 만나 영상 콘텐츠를 만들었다. 페이스북과 유튜브 <이십세들> 페이지가 만들어졌고 팀원들과 만든 영상이 올라갔다. 내 자리에서 깊이 있는 글도 쓰고 싶어 찾은 공간은 <고함 20>이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자처하다 보니 소위 청년미디어라는 곳에도 속하게 된 것이다.


다시 유에서 무로.


그런데 영상 기획을 하고 글을 쓰며 아이러니하게도 “청년미디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청년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피로감을 느껴서도 그렇지만, “청년”이라는 것이 텅 빈 기표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청년이란 무엇일까? 애초에 막연한 단어였으며 나 또한 청년 일반을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타깃 독자를 위해서 말하고 있고,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다 보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청년미디어에서 느꼈던 강렬함을 회고했다. 청년이라는 모호한 단어에 왜 나는 매력을 느꼈을까? 결국은 ‘새로움’에 끌렸던 게 아닐까. 새롭고 신선한 미디어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멋지다고 느꼈던 것이다.


내가 염증을 느낀 레거시 미디어는 말해주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서도 해결책에 대해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젊은 세대들이 신문이 너무 길고 뉴스가 딱딱해서 보지 않는다는 말은 반쯤 맞고 반쯤 틀리다. 젊은 세대들은 길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결될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일들을 심지어 길게 말하기 때문에 신문과 뉴스를 외면한 것이다. 더 이상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유효하지 않다. 수용자들은 소통하기 원하고, 참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기존 미디어에서는 앞다투어 경주하듯 문제 현상에 대해서만 나열할 뿐, 해결을 위해 ‘내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새로운’ 유로.


기존 미디어에서 염증을 느낀 후 자연스레 이제 그 대체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새로움’이 필요하다. 발화하는 주체가 무엇이든 이제껏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새로운 저널리즘이 필요하다. 뉴스와 뉴스가 아닌 것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고, 수용자들은 수동적으로 뉴스를 소비하지 않는다.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 말하고, 새로운 아젠다를 그들이 선호하는 문법으로 전달해주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미디어도 팬덤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면 많은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앞서 말한 두루뭉술한 ‘새로움’이라는 것도 그렇다. 팬을 형성하는 것은 결국 신뢰도와 충성심이다. ‘이 미디어라면 믿고 본다’는 신뢰를 수용자에게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한 독자들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이 관심 있는 것으로 아젠다를 세팅하고, 그들이 보기 편한 포맷으로 만들어야 한다. 


짝사랑

문제의식과 도전 그리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결론도 있지만 이것들은 아직 그저 ‘짝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디지털’에 관해서도, ‘저널리즘’에 관해서도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또한 이상적인 모델이 현실에서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돈이 되어야 한다. 앞서 말한 여러 청년 언론들이 옳고 좋은 일들을 하지만 버거워 보이는 건 여전히 불안정한 수익구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영’의 측면에 관해서는 더욱 아는 바가 없어 늘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닳고 닳아버린 뉴미디어라는 키워드를 가슴에 품고 애달픈 짝사랑을 앓는 가운에 넥스트 저널리즘 지원 공고가 떴다. 앞에서 언급한 어쩌고 저쩌구들을 설명하며 외쳤다!


… 새로운 세대를 위한 저널리즘에 필요한 한 꼭지를 맡고 싶다. 그것이 대체 불가능하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를 위한 발판으로 이 넥스트 저널리즘 스쿨이 내게 너무도 필요한 교육이라 생각한다 …


낯간지럽고 나이브하지만 패기 넘치는 지원서를 제출하고, 정말 운이 좋게도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게 7월의 첫째 주와 둘째 주, 하얗게 불태운 열흘이 내게 왔다.


이 기간동안은 매일 밤 10시마다 마취총 맞고 졸도해서 잠을 잤다.


좋은 수업들이 매일매일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수업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인싸이트를 공유하고 네트워킹하는 게 가장 좋았고 내게 크게 남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수업에 갈 때마다 그 파이낸스 타워 21층은 내게 너무도 안전한 공간이었다. 미디어에 (과하게) 관심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매일 (우리끼리는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하는 곳. 겨우 2주짜리 프로그램이 얼마나 나를 바꾸려나, 솔직히 조금은 회의적인 태도로 임했지만 열흘째에는 단언컨대 너무도 변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세상에. 이런 필터버블이라면 편협한 인간이라고 질책받아도 좋으니 영영 벗어나기 싫다고 느꼈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라면 조금은 용기 내서 이것저것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하는 소위 ‘미디어 뽕’이 머리 끝까지 찬 것은 덤. 여전히 이런 기억으로 넥저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수강생분들 사이의 예의바름과 배려, 따스함 덕이었다고 믿는다. 그 고마움을 되도록 잊지 않으며 나 또한 살아가면서 타인의 평온에 누가 되지 않으려 한다. 정말로 감사한 열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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