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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ro dodo XL Sep 03. 2018

시작글... 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감수성이 풍부해요?

시골만경, 글쓴이가 글을 쓰기 시작하려 하는 이유

 내륙의, 바다라고는 짠내조차도 맡아볼 수 없는 더운 공기와 건조한 바람만 부는 곳에서 태어났다, 심지어 읍면 단위의 시골 마을.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1시간에 한 대 꼴로 있으며 그 마저도 초저녁이면 끊어졌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시골, 촌, 장닭이 홰를 치며 길게 내지르는 고함에 잠을 깨고, 저녁놀과 함께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 때 함께 잠드는 그런 시골집이었다.



 집 앞 텃밭에는 항상 먹거리가 넘쳐났고-그만큼 매일 힘들게 밭일을 해야 하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과수원과 벼들이 익어가는 논이 펼쳐졌다. 집에는 대청마루가 있었고, 비 온 뒤에는 흙마당과 흙도로가 물 웅덩이를 만들었으며 하교길 불어난 계곡 물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그런 곳이었다. -지금은 모두 답답한 시멘트로 덮여 있다, 불편함을 잃고 복사열을 얻었다-


 학교가는 길은 초등학생 걸음으로 40분, 소나무가 빽빽한 산길을 걸어올라가 *"정살뫼" 라고 부르는 곳을 넘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하나 건너고 논 사잇길로 걸어가면 초등학교가 있는 옆 마을이 나타났다. 매일 아침 -그 때는 아이들이 많았으니- 무리를 지어 등교를 했고 하교길에도 늘 함께했다. 산딸기와 뱀딸기를 구별할 줄 알고, 먹을 수 잎는 잎과 먹을 수 없는 잎을 구별했으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고도 배앓이를 안 했으니 그 당시에는 아직 오염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듯 싶다.



 여기까지 들으면 혹자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글쓴이는 1980년 생으로 80년대에 있었던 일들이다. 그렇다 지금 불혹을 목전에 놓고있는, 한참 사회생활에 대한 회의와 현실이 얼마나 힘든지를 격감하고 있는, 결혼한 친구들은 이제 갓난쟁이 티를 벗어난 아이들과 함께 언쟁을 하고 있을, 노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재테크와 부동산은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렸을 때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읍내", 혹은 "시내" 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최소한 15분 이상 나가야 했다. - 도시의 15분과 시골의 15분은 다르다 - 또한 버스가 언제 오는지 보여주는 전광판과 같은 건 있을 리 만무하고 버스가 언제 오는 지 보여주는 시간표 따위도 없었다. 무언의 약속, 예를 들어 '11시 버스' 라고 하면 '11시 근처에 온다' 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11시 버스를 타기 위해서 정류장에 최소한 11시 15분 전까지는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고, 11시가 넘어서 버스가 오지 않아도 화를 내거나 초조해 하지 않았다. 그냥 저 멀리서 -시골이기 때문에 5분 이상 걸릴 거리에서 부터 오는 버스가 보인다- 달려오는 버스가 보이면 지루한 기다림 따위는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은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땐 시골에서 자라야죠, 자연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또한 편견이고 지극히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평가하는 듯한 저 말이 나는 너무나 듣기싫다. 감수성이 풍부한 것은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개성인 것이지 절대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기, 춤 등 똑같이 교육을 받아도 모두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 처럼, 그것도 갖고 태어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회백색 시멘트 담벼락에 맺힌 빗방울에서 시상을 떠올리고 찻길 한켠에 배수구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를 보며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법. 시골에서 태어났다고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쯤하면 알 수 있겠지만 글쓴이는 시골이 너무나 싫고 시골에서 태어난 것을 너무나도 힘들어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삼류 대학이라도 서울소재의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그래서 겨우겨우 탈출할 수 있었던 그 때 까지 시골에서의 삶은 너무나 힘들고 우울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지금 자존감이 낮아져 버린 그 시발점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앞으로 내가 써 나갈 글은 "시골에서 태어나 힘들었던 점" 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만약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이라는 전제 하에 많은 혹은 일부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자 한다.



* 정살뫼...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나 학교가는 길에 있었던 무덤들이 즐비한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공터가 있었는데 거기를 저렇게 불렀다. 시골에는 참 정감있지만 의미가 불명한 '장소'의 이름들이 많은데 '영베이', '까칫골', '설못', '움마(윗마을)', '아름마(아랫마을)', '돌빵구'... 다 기억은 안나지만 이런 곳들이 있었다.


201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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