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수행비서가 쓴 <몰락의 시간> 통해 본 '정치폭력사태'의 고찰
2024년, 새해를 맞이하여 첫 책을 골랐다. 바로 <몰락의 시간>이다. 이 책은 정치인 안희정을 가까이에서 수행했고, 피해자를 조력했던 전 비서 문상철의 글이다.
그는 책을 통해 "가장 가까운 참모로서 범죄가 일어나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범죄가 일어난 이 거대한 권력의 성을 쌓는데 일조했다(p.163)"고 고백한다. 또한 정치권력을 쥔 누구라도 제2,제3의 안희정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여 한국 정치의 뒤틀린 부분을 꼬집는다.
저자는 성폭행 사건은 하나의 트리거일 뿐 이미 안희정의 정치는 몰락하고 있었음을 고발하며, 그것을 '몰락의 시간'이라고 지칭한다.
안희정 사건 이후 연이은 오거돈, 박원순 사건은 비단 몰락의 시간이 안희정만의 것이 아니며 한국 정치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나는 또 다른 질문을 2024년인 지금, 다시 던지고 싶었다. '과연 몰락의 시간은 끝난 것일까'라고 말이다. 우리는 지금도 몰락의 시간을 경험하고,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p.162) 2018년 3월 5일이 되었다. 김지은 씨한테 그날 저녁 JTBC 뉴스룸에 출연 여부를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계부터 사정기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을 고발하는 일이었기에 수사기관에 고발만 할 경우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하거나 이 사건 자체가 흐지부지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출연을 고민하고 있는 중에 가해자와 가해자 주변인들로부터도 계속 전화가 온다며 혼란스러워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 김지은 씨와 그 어떤 말도 침착하게 나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김지은 씨는 방송 출연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설사 출연한다 하더라도 얼굴과 실명을 밝힐지 여부도 계속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당일 늦은 오후부터 안희정 지사의 성폭행 사건이 방송에 나올 거라는 지라시가 여의도에 돌기 시작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차기 대권주자로 불리며 다양한 권력망을 지닌 정치인을 보좌해본 피해자이기에, 본인의 선택에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방송에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여의도에 돌기 시작했다는 건 피해자를 다시 한번 고립시키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곳곳에 안희정을 조력할 만한 이들이 깔려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준 셈이었다.
피해자가 방송을 통해 고발한 이후, 국회에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중심으로 한 소문들이 활발하게 돌았다. 이른바 여의도의 생태를 아는 이들에게 '지라시'의 등장 자체는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정치 공간에서 '뒷소문'은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생산되어 정치적으로 퍼져나갔고, 특히나 '여성'이 등장인물일 때, 손쉽게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사이 고립되는 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 기저에는 성폭행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 정치조직을 보위해야 한다는 조직보위론이 한 축에 있다. <몰락의 시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안희정 수행비서의 업무 매뉴얼에는 다음 8가지의 핵심 업무가 실려있었다.
(p.67)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주변의 업무를 단순화하는 것, 대화 시 사실에 입각한 메시지를 낼 수 있도록 사실관계를 체크하는 것,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지사를 보호하는 것, 동향을 파악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 주변의 사람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안 지사의 보조 기억 수단이 되는 것, 감옥에 대신 갈 정도로 무조건적인 로열티를 갖는 것, 안 지사를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악역이 되는 것, 개인 관리라는 명분으로 수행비서 스스로를 철저히 지우는 것 등이었다.
민주주의 지도자를 보필한다는 목적 아래 실린 사항이었으나 저자의 표현(p.163)과 같이 "정치인을 더 무력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근거"가 되어 "더불어 그 어떤 잘못도 허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업무 매뉴얼을 만들게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본인에게 제공된 권력을 넘어서 범죄행위까지 저지른 그 지도자가 가장 큰 책임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정치권 내 성폭력 사건이란 성별 권력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권력의 차이와 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범죄이며, 정치권 내 폐쇄적인 조직보위론이 만연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책은 드러낸다.
대의를 위해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위'해야하며, 따라서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조직 밖으로 알려선 안된다는 조직보위론. 여기에서 대체 대의는 무엇이며, 내부의 '우리'는 누구인지 되묻게 된다. 미투운동을 만난 조직보위론은 피해자에 대한 가해행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인정하더라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운운하며 과거를 부정하는 형태로 진화해 왔다.
다가오는 2024년 총선, 정치판에 누구를 플레이어로 세울 것인가에 대한 거대 양당의 공천 과정만 봐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당대의 문제의식을 받아안겠다고 말한 양당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 같다.
정당은 정치적 뜻을 같이하는 결사체이기에 당이 뜻하는 바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공천이라는 방법을 통해 후보자를 정하는 중요한 과정을 거친다. 이에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공직선거후보자추천관리위원회(이하 공관위)를 구성하고, 공천 기준으로 각각 '신4대악'과 '5대혐오범죄'를 발표했다.
국민의힘 공관위는 '신4대악'으로 성폭력 2차 가해, 직장 내 괴롭힘, 학교 폭력, 마약 범죄를 규정하였다. 더불어민주당 공관위 또한 '5대 혐오 범죄'로 성범죄, 음주 운전, 직장 갑질, 학교 폭력, 증오 발언을 내걸었다. 하지만 각 당의 공천위원도, 검증 통과된 후보자들의 면면은 앞서 정한 규정과 기준이 무색할 뿐이다.
국민의힘의 경우, 정영환 공관위원장은 판사 시절인 1991년, 성매매 피해 여성에게 흉기 협박, 강간 시도, 피해자 상해 등을 한 이유로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사실이 한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이에 당시 한국 사회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상당히 문제적인 선고였음을 지적받자, 정영환 위원장은 해당 판결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성인지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만을 고수했다. 공관위원장 조차 성인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가운데 '신4대악'으로 규정한 성폭력 2차 가해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원수연 공관위원은 2024 총선 여성주권자 행동 '어퍼' 논평에 따르면 2018년 만화계 미투 운동에 참여한 성폭력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고,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도 피해자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에게 2차 피해의 굴레를 씌우고 있다는 게 여성단체의 입장이다.
공천 심사를 요청한 이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광주 서구갑 출마를 준비했던 강위원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특보는 과거 성추행 전적으로 문제제기를 받았다. 이에 강위원 특보는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나 입장문을 통해 "저로 인해 이 대표와 민주당의 총선 승리 전략이 흔들리게 둘 수는 없다"고 밝히며 '선당후사'를 밝히는데 급급했다.
경기 성남중원 출마를 준비했던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성희롱 발언으로 논란이 된 후 더불어민주당 공관위가 "일련의 문제에 단호하고 엄격히 대처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자, "당과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저의 도전은 여기에서 멈춥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원과 지지자분들의 지지와 격려 덕분이었습니다"이라고 밝혔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아닌 당에 대한 충의를 밝힌 셈이다.
한편 당 안팎의 문제 제기에도 꿋꿋하게 본인의 출마 의지를 꺾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정봉주 더불어민주당 교육연수원장은 2018년 불거진 '기자 지망생 성추행 의혹'으로 2020년 총선에서는 후보 부적격 판정을 받았으나, 2024년 총선 예비후보의 검증 심사를 통과했다. 정봉주는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지금 당직도 맡고 있다"고 말하며 2020년 부적격 판정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는데 정무적 판단으로 컷오프가 됐다"고 전했다. 만약 정봉주 원장에게 정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면, 더불어민주당은 자기 당 후보와 공천관리위원회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전후 사정을 소상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추가 입장은 현재까지 없는 상황이다.
그의 말처럼 논란이 되는 인물들에게도 이미 당의 특보, 원장 등 당직이 맡겨진 상태였다. 이전에는 총선 공천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을 뿐, 정무직으로서 거리낌 없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셈이었다.
한편 피해자의 곁에 선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편에 섰던 충남도지사 비서실 주무관이었던 신용우의 경우, 후보 검증이 무기한 보류되고 있다. 신용우 후보는 "여러 차례 중앙당에 질의했지만 '계속 심사 중'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묵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몰락의 시간> 저자가 피해자를 조력한 후, 마주했던 상황과 닮아있었다.
(p.209) "실력있고, 좋은 분인건 알겠지만, 아시다시피 사실 저희도 좀 부담스러워서요. 죄송합니다." 6개월 간 스무 곳 정도에 지원했지만 대부분 최종에서 떨어졌다. 이게 딱 나의 위치값이었다. 정치권에서 10여 년간 쌓은 경력과 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안타까워하는 몇 명의 선배들이 나서주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정치권에서 발 붙일 수 있는 곳은 이제 없었다.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고 외친 결과, '성폭력 2차 가해', '성범죄'가 지금까지 총선의 공천 기준으로 남아있게 됐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으며, 오히려 문제 제기한 이들을 당 바깥으로 고립시키는 행태가 만연하고 있다. 그렇게 '몰락의 시간'이 이어져오고 있는 가운데 2024년 총선이 다가왔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부터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까지 정치인을 향한 폭력 범죄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이에 정치인 대상 폭력에는 여야가 없다는데 모든 정당이 공감하며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 역시 "정치테러는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도전이다. 폭력 행위는 어떤 경우도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 어떠한 이유로도 폭력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괴한이 유명 정치인을 테러하는 것만 '정치폭력 사태'라고 할 수는 없다. 가해자인 유명 정치인을 지키겠다며, 피해자와 피해자 편에 섰던 정치적 동료를 부당하게 매장하는 것도 '정치폭력 사태'이다.
모든 정치인들은 정당 안에서 함께 활동하던 일원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했는지, 성찰하길 바란다. 이는 정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동료들을 위함이기도 하며, 나아가 혐오와 갈등, 폭력의 경계를 넘어 더불어 살아가려는 시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정치폭력 사태'가 아니다. 언제나 있었으나, 무시받고, 외면당했던 피해자들이 있었다. 지나쳐 왔던 '몰락의 시간'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한 글]
경향신문, "정치 '안희정 미투 증인' 신용우 "전과·사회적 물의 없는데도 검증 보류", 2024.01.17.
2024 총선 여성주권자 행동 어퍼 성명 논평 http://women21.or.kr/statement/23430, http://women21.or.kr/statement/23378*
이 글은 오마이뉴스 [어쩌다 한국이] 시리즈(24.02.01)에 게시되었습니다. https://omn.kr/278q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