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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May 04. 2023

조금 일찍 찾아온 초여름 입맛

간단히 만드는 소바 요리

요새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은 선을 넘으면 착실히 모습을 바꾸던 계절도 옛말이다. 봄의 변화가 가장 도드라진다. 갑자기 눈을 내리는가 하면 반바지를 꺼내 입게도 만든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최근 런던도 꽤 더운 봄날을 겪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데 중앙난방 라디에이터가 돌아가는 아이러니. 밸브를 잠그고 밖으로 나가니 공기의 냄새가 변해 있다. 콧 속을 기분 좋게 채우는 무게감. 초여름의 냄새다. 조금 이른 듯싶지만 싫지 않다. 기지개를 켜면서 생각했다. 오늘 점심은 소바로 하자.


소바에 빠지게 된 계기는 짧은 뉴욕 생활이다. 연인을 만나러 처음 찾은 도시에 반해버렸고, 여름 방학 동안 런던 집에 세를 놓은 돈으로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스 Williamsburg의 서블렛을 구했다. 현지 친구들은 싸고 맛 좋은 음식점들을 많이 알았다. 그중 하나가 맨해튼 이스트빌리지 East Village의 소바야 Sobaya다. 저녁엔 비싸지만 점심 특선으로 일본식 도시락과 소바 정식을 세금 전 15달러에 맛볼 수 있었다. 메트로로 한 정거장이라 일주일에 두 번은 갔다. 때때로 셰프가 입구 옆 테이블에서 큼직한 칼로 소바 반죽을 썰곤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윌리엄스버그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엉망이 되고, 소바야의 점심 세트도 두 배 가량 올랐다. 여름과 뉴욕, 소바가 이어진 기억만 그대로다.






밖에서만 먹던 소바는 미나미와 살면서 내 식생활에 편입됐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소바 먹을래?" 하며 내 몫까지 만들어주었다. 그녀의 요리는 항상 간단하다. 우묵한 그릇에 시판 쯔유(가다랑어포로 맛을 낸 일본식 간장)와 물을 섞어 냉장고에 넣고, 소바를 삶고, 차가운 물에 헹궈 물기를 빼고, 접시에 담아낸다. 차가워진 소스와 고추냉이, 간 무를 곁들면 끝이다. 고추냉이와 무는 소스에 넣어 풀지 않는다. 젓가락으로 조금씩 집어 면 위에 올리고, 면을 절반 정도만 소스에 찍어 먹는다. 다 먹으면 소바 끓인 면수인 소바유(蕎麦湯)를 소스에 부어 입가심한다. 뉴욕의 소바야에서도 소바유를 줬다. 차가운 소바 뒤에 즐기는 따뜻함이 좋아, 소바를 삶고 물을 다 버리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소바만 단독으로 먹기에 어딘가 허전할 때가 있다. 음식점에 가서 먹는다면 단연 모둠 템푸라를 함께 주문하지만, 집에서는 손이 많이 가므로 사양이다. 시원함 일색으로 가고 싶은 날은 두부가 제격이다. 씨를 뺀 매실절임을 올리고 꿀을 뿌리거나, 간장을 살짝 끼얹고 가다랑어포를 올린다. 두부 토핑에는 한계가 없다. 낫또가 있으면 토마토와 간장, 연겨자 조합도 훌륭하다. 약간의 따뜻함이 필요한 날은 일본식 계란말이인 다시마키타마고(だし巻き卵)를 만든다. 뭐가 됐든, 주요리인 소바만큼 간단해야 한다. 소스를 밀폐용기에 담으면 점심 도시락으로도 손색이 없다. 김발을 잘라 도시락통에 깔면 바닥이 축축해지는 걸 막을 수 있다. 데울 필요 없이 바로 먹을 수 있어 전남편이 무척 좋아하는 메뉴였다.  


소바 샐러드도 여름날의 단골 메뉴다. 일본 만화 <어제 뭐 먹었어?>에 나온 토마토참치국수의 응용 버전이다. 차가운 소바, 삶은 달걀, 얇게 저며 소금에 절인 오이, 토마토, 마요네즈에 버무린 캔 참치,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샐러드 야채, 간장, 식초, 참깨를 듬뿍 뿌리고 비벼 먹는다. 배부르고 설거지도 적다.   






쌀쌀해지면 차가운 소바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레 식는다. 대신 따뜻한 카케소바(かけそば) 모드가 된다. 한가하면 다시마, 가다랑어포, 간장, 미림으로 육수를 만든다. 여유가 없으면 역시 시판 쯔유다. 카케소바의 매력 역시 간단함이다. 미역과 파 등 단출한 고명만 있어도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튀김을 만들 때 떨어져 나간 튀김옷 같은 아게다마(揚げ玉)나 식초에 절인 다시마를 가늘게 썬 토로로콘부(とろろ昆布)를 사 두면 요긴하다. 면을 삶는 동안 수란이나 데친 시금치를 준비할 수도 있다. 국물까지 마시니 배도 부르다. 반찬이 따로 필요 없다.


1월 1일이 되면 나는 떡국을, 미나미는 토시코시소바(年越し蕎麦)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일본에서 새해 첫날 먹은 음식이다. 긴 메밀면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카케소바와 별 차이가 없고 이름만 다르다. 같은 음식에 이름으로써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재미있다. 소바엔 거칠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고소함이 있다. 우동을 백미라고 한다면 소바는 현미 같다. 글루텐이 적어 단조로운 식감을 가지지만 풍부한 메밀향이 매력이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카레 등에 곁들거나 볶아서 야키소바(焼きそば)를 만드는 것보다 메밀 맛을 느낄 수 있는 심플한 방법을 선호한다.


소바를 삶을 때 주의할 점. 잠깐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 거품이 후루루 올라온다. 치이익 하는 소리에 눈을 돌리면 이미 때는 늦었다. 중간중간 물 반 컵을 부어 방지할 수 있다.  



다시마키타마고와 닭가슴살 냉채를 곁들인 뚝딱 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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