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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28. 2023

맛을 가리는 표현의 벽

말이 생기면 맛이 보인다

우리말은 상당히 다채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사물의 움직임이나 감정의 뉘앙스를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지 않지만 소설 등에서 접하면 가슴이 턱, 막힐 만큼 설레는 표현들이 많다. 왜 나는 이런 단어들을 모르고 살았던 걸까,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말의 멋들어짐은 계속해서 발견하고 가까이하고 싶은 존재다.


단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 미각의 표현이다. 우리말의 우수성을 논할 때 '한 가지를 둘러싼 무궁무진한 표현'을 예로 든다. 검다, 검디검다, 까맣다, 거무죽죽하다, 거무스름하다, 거무튀튀하다, 검푸르다, 거무뎅뎅하다, 거무끄름하다, 꺼뭇꺼뭇하다... Black을 표현하는 단어가 77가지나 있다고 한다. 한데 왜 맛을 표현하는 단어들엔 이토록 인색한 걸까.






다양하고 폭넓은 전통음식을 자랑하는 나라인데 맛에 관련된 묘사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음식매체와 함께 한 여정에서 깨달은 역설이다. 우리 편집부에는 몇 가지 철칙이 있다. 불필요하게 어려운 말을 쓰지 않을 것. 최대한 외래어 사용을 지양할 것. 하지만 맛을 묘사하는 데 있어 이 두 가지 철칙을 지키는 건 쉽지 않다. 1에서 10까지의 스펙트럼을 구분 짓는 10가지의 구획 대신 1, 5, 10의 단순화된 스케일로 뭉뚱그려 표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잡한 치즈의 맛이 '꾸리꾸리하다'가, 크림이 주는 여러 식감이 '풍부한' 것이 되는 식이다. 한정적인 표현을 계속해서 반복하거나 배배 꼬는 데서 오는 피로감도 있다. 요식업계에서 자주 쓰이거나 (flavour profile 등) 취재원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오롯이 담기 어려울 때도 있다.


와인의 테이스팅 노트에 사용되는 영어 단어들이 지나치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 세분화된 단어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건 그만큼 미묘한 맛과 식감의 뉘앙스를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 음식도 맵고 짜고 달고 시고 감칠맛 나고 풍미가 좋은 것 이상의 세세하고 미묘한 맛들을 가진다. 얼큰하고 달큼하고 '시원한' 것처럼. 대체할 수 없다면 본래의 표현이 가지고 있는 맥락을 파악하고, 그 본질이 오염되지 않게 잘 살려서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정작 영어권에서 쓰지 않는 더치페이, BJ(상당히 음란한 말로 들린다), SNS 등의 외래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대신에.






어떤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생기면 그 개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말의 힘이다. 2002년 미국 연구진은 쓴맛, 단맛, 신맛, 짠맛 외에 5번째 맛을 느끼는 혀의 수용체를 발견했다*. 영어엔 이 맛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었다. 짭조름한 것을 아우르는 단어 '세이버리(savoury)' 대신 그 맛을 정조준하는 외래어를 사용했다. 1908년 일본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 池田菊苗가 처음 정의한 감칠맛의 일본어인 우마미(うま味)다. 이젠 여러 문화권에서도 감칠맛을 정확히 이해한다. 맛을 설명하는 다른 언어의 표현을 수용해 감각을 개방한 사례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좌> 굴의 식감과 맛을 표현한 차트 (크레디트: Patrick McMurray) <우> 위스키의 맛과 향을 담은 차트 (출처: Sprit Kiosk.com)



음식의 맛과 질감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들의 일부**





*Nelson, G. et al,.  (2002) An amino-acid taste receptor, Nature, 416th edition, 199–202p


**Mukisa I. M., Kiwanuka B. J. (2017) Traditional processing, composition, microbial qualityand sensory characteristics of Eshabwe (ghee sauce), International Journal of Dairy Technology, Vol 70,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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