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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24. 2023

최고의 토마토소스, 고마워 디에고.

단순할수록 명확해지는 식재료의 차이

시간에 쫓기거나 요리가 귀찮을 때 토마토소스 파스타 만한 건 없다. 토마토 캔이 있으면 쉽게 만든다. 토마토를 씻고, 껍질에 십자 모양의 칼집을 내고,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얼음물에 넣어 식히고,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고, 푸드프로세서에 가는 수고가 캔 하나에 집약되어 있다. 물이 최고조로 오른 노지 재배 토마토를 수확 후 빠르게 가공해 그 맛을 보존했다. 토마토 즙에 담겨 있으니 버릴 것도 없다. 토마토소스 레시피들은 기본값을 가진다. 올리브 오일에 다진 마늘과 양파, 셀러리, 당근 등 야채를 볶는다. 토마토 캔과 농축 페이스트인 토마토퓌레(pureé)를 넣고 끓인다. 기호에 따라 다진 고기 같은 부재료를 추가한다. 바닥이 타지 않게 이따금씩 저어주면 완성이다. 미국인들은 버터를 넣기도 하더군. 


나에게 양파, 마늘, 토마토 캔, 토마토퓌레, 월계수잎은 토마토소스의 최소 필요조건이었다. 재료를 손질하고, 볶고, 토마토를 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심드렁하게 앉아 스마트폰을 보면서 만들었다. 빨리 먹고 싶은데 토마토의 산미가 날아가지 않으면 설탕 한 스푼을 넣고 시간을 단축했다. 정말 맛있다,라고 감탄한 적은 별로 없었다. 전자레인지용 즉석요리나 시판 파스타 소스가 아니라는 점에 의미를 뒀다. 진정한 토마토소스를 접하기 전까지는.






왜소한 체구와 덥수룩한 수염의 디에고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출신이다. 지상낙원인 스페인의 마요르카 Majorca 섬에서 히피처럼 살았다. 그곳에 휴가를 온 내 플랏메이트와 사랑에 빠졌고, 런던까지 자신의 캠핑카를 몰고 와 우리 집에 들어왔다. 영화 같은 스토리였지만 그런 에너지가 전혀 감지되지 않을 만큼 조용한 친구였다. 우리는 요리를 접점으로 조금씩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마요르카에서 비건 셰프로 일했다고 했다. 


어느 날, 약속이 있어 나가려는데 주방에서 마주친 디에고가 토마토소스 파스타 한 그릇을 내밀었다.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후다닥 먹고 달려 나갔다.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점점 그 맛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살면서 먹은 토마토소스 중에 단연 최고였다. 만드는 방법이 너무 궁금했다. 다음날 디에고에게 정식으로 감사를 전하고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길 부탁했다. 자신의 영어가 짧다며 난색을 표하는 그였지만, 배워놓지 않으면 평생 아쉬움으로 남으리라. 그냥 만들면 내가 옆에서 지켜보겠다고 설득했다. 


어머니께 배웠다는 토마토소스를 만드는 과정은 충격적으로 간단했다. 재료도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토마토 캔, 마늘 한 알, 바질 한 장이 다였다. 마늘은 통으로, 바질 잎은 군데군데를 조심스레 찢어 넣었다. 마늘과 바질이 충분히 들어가야 풍미가 좋아진다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과하면 맛을 망친다고 했다. 훗날 직접 시험하니 정말이었다. 바질을 넣는 타이밍을 물었더니 토마토의 냄새가 변할 때,라고 조용히 답하는 그였다. 






가르쳐 준 대로 며칠을 시도했지만 그 맛을 구현하기 어려웠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뭐가 문제인지 고민했다. 며칠 뒤 슈퍼마켓에 갔을 때 여러 종류의 토마토 캔 사이에서 디에고가 썼던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평소 사용하던 제품보다 조금 비싼 바인 체리토마토(vine cherry tomatoes) 캔이었다. 그래봤자 몇백 원 차이였다. 그걸 써보니 기억하는 맛에 근접할 수 있었다. 차이는 재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며칠 후, 아르티잔 식재료 리테일러인 나투라 Natoora의 창립자 프랑코 푸비니 Franco Fubini를 인터뷰하게 됐다. "맛을 중심으로"가 모든 제품을 관통하는 큐레이팅 기조이자 신념인 곳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매장을 둘러보는데 토마토 캔이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Sardenia 산이었다. 일반적인 토마토 캔 대비 두세 배 가격이었지만 나투라에 있다면 필경 이유가 있다. 프랑코가 추천한 요리용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도 한 병 샀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준비를 하는 디에고에게 토마토 캔 하나를 건넸다. 마침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만들 참이었다며 웃었다. 


다음날 만들어 본 토마토소스는 감동이었다. 재료의 차이는 거대했다. 디에고 덕분에 평생의 레시피를 얻었고, 재료의 중요성을 영혼에 새겼다. 그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 사르데냐 토마토 캔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애용하고 있다. 당도가 높아 산미가 금방 사라진다. 설탕을 넣을 필요도 없다. 다른 토마토 캔을 먹기 힘들 정도다. 한국에도 가져가 가 요리할 만큼 좋아한다. 끓고 있는 토마소 소스의 냄새가 기분 좋게 바뀔 때, 나는 고마운 친구를 떠올린다. 




<좌> 파르마쟈노 레지아노를 듬뿍 뿌린 토마토소스 부카티니(bucatini) <우>안토넬라 사르데냐산 토마토 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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