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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21. 2023

찬장 속의 구원자

자유로운 요리의 완성,  토마토 캔

냉동고와 전자레인지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작은 스튜디오의 공간을 넓게 쓰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스스로도 얼마 못 갈 줄 알았는데, 익숙해지니 나쁘지 않다. 식생활의 변화는 필연적이었다. 모든 재료를 신선할 때 소진해야 하니 장을 조금씩 자주 본다. 처음엔 이삼일 동안 무엇을 먹을지 구상하고 그에 맞춰 장을 봤다. 지속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다음날 먹고 싶은 음식이 바뀌거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무언가에 강렬히 '꽂힐' 때가 있어서다. 지금은 다양하게 활용 가능한 식재료 위주로 선택한다. 메뉴의 결정은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는 미래의 나에게 맡긴다.  


출장이나 촬영을 제외하면 거의 재택근무다. 안정적인 식재료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점이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문제다. 촬영이 길어져 밖에서 식사를 하거나, 갑자기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외출하는 식이다. 돌발 외식으로 재료의 사이클이 꼬이면 요리는 한층 창의력을 필요로 한다. 시간제한이 있는 퍼즐이랄까. 여유가 있으면 재미있지만 바쁘거나 피곤할 땐 스트레스다. 냉장고 안을 쏘아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배는 고프다. 집어치우고 라면이나 끓이자는 악마의 속삭임을 물리치는 건 토마토 캔의 존재다.    








토마토 캔의 범용성을 보여준 건 아일랜드 출신 줄리아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머물던 홈스테이의 호스트로, 깐깐한 할머니를 상상했는데 3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성이 나와 깜짝 놀랐다. 투 잡을 뛰는 싱글맘은 항상 바빴고 깜빡하는 것이 많았다. 호스트로서는 실격이었지만 정 많고 따뜻한 그녀와 금방 친구가 됐다. 줄리아의 요리는 수준급이었다. 세계를 여행하며 모은 향신료들로 주방 찬장이 가득했다.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처럼 요리도 거침이 없었다. 고민하지 않고 있는 재료와 향신료로 뚝딱 요리를 만들어냈다. 어느 날 아침 주방에서 빈사상태의 그녀와 마주쳤다. 딱 보니 숙취였다. 무엇으로 해장을 할까 내심 궁금했다. 그녀가 찬장에서 집어든 건 토마토 캔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토마토에 먹기 좋게 썬 베이컨, 치킨스톡 가루, 바질 한 장을 넣었다. 냄비채로 가져와 타바스코 소스를 뿌리곤 먹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에 십 분도 안 걸렸다. 맛도 좋았다. 라면을 끓이는 수고와 별반 차이도 없는데 하나의 수프가 되다니. 인상적이었다. 


그날 목격한 자유로움이 내 안에서 영글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줄리아의 집을 나와 스스로 요리를 시작하며 한동안 레시피에 매몰됐었다. 디테일도 착실히 따랐다. 결과물이 별로일 땐 다른 레시피를 시도했다. 제시된 재료는 왠지 다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식재료를 사고, 그 요리를 안 하면 계륵이 됐다. 그러다 문득 줄리아가 요리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녀의 손에는 레시피가 없었다. 


요리는 복잡한 것이 아니야. 스스로를 가뒀던 감옥을 벗어나며 되뇌었다. 열린 문 뒤로 레시피에 대한 집착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흘러가는 대로 만드는 요리는 즐겁다. 즉흥적인 요리에서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토마토 캔은 퍼즐의 빈칸을 채워준다. 특성이 다른 재료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힘도 뛰어나다. 난 토마토 캔을 양탄자 삼아 국경을 넘나는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에 고추장과 마늘을 살살 볶아 토마토 캔을 붓고, 냉장고의 야채를 넣고, 달콤한 향이 나는 훈제 파프리카 가루를 더해 스튜를 만드는 식이다. 요리에 무한한 창의성을 부여하는 마법의 도구. 심지어 저렴하고 보관 기간도 길다. 찬장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는 이유다. 




토마토 캔 사용의 예. 가운데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즐기는 아침식사 샥슈카(shakshouka). 나머지는 즉흥적으로 만든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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