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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카타르 사막 한 가운데서의 회고

by 변민욱

정확하게 3년 전 이즈음에 문학회 동아리 방에서 MYSC에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MYSC에서 MYSC를 나가며 해왔던 일과 문학에 대한 연관 관계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다. 그 때 주위에 많은 분들이 '갑자기 그 쪽으로?'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짧은 경험으로 '갑자기'도 아니였고 '그 쪽'도 아니였다. 특히나 오랜만에 까맣게 그 존재를 잊고 있던 브런치에 글을 쓴다. 이는 오랫동안 그 역할을 사내 메신저가 대신했고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그간의 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왜 '갑자기'도 아니였고 '그 쪽'도 아니였는지 써보고자 한다.


_DSC1845.jpg 그렇다 이 글은 카타르 도하에서 레이오버 20시간 때 초안을, 돌아와서 앞 뒤로 퇴고를 한 글이다.

셰익스피어 시대 이래로 시에 대한 평론에 가장 많이 쓰인 문장 중 하나는 'rhyme or reason'이다. 그러나 평론과 달리 많은 문학회/합평에서는 주로 'neither rhyme nor reason'과 같은 부정문으로 쓰였다. 서툴거나 의미가 헝근 시에 '운율도 없고 의미도 없다'를 이야기할 때 쓰였다. 보통 실천적인 시를 쓰는 분들에게 건네는 평인 '의미(의도)가 시를 앞선다' 와 같은 평도 위와 맥을 같이 한다.


위 문장은 문학/영화에서도 여러 번 인용된다. 특히나 영화 <노팅힐>에서는 '생각할수록 알게 되는 건 인생에는 rhyme도 reason도 없다는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문제나 앞선 두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고 정의하기 어려운데 있다. 그리고 위 관용구의 생명력과 아름다움 역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삶 곳곳의 빛과 어둠이 위 문장과 만날 때 발생한다. 때때로 '운율과 뜻', '호흡과 의미'처럼 말이다.


문장은 여백의 해석을 허락하지만 삶은 해석할 여백을 쉽사리 주지 않는다. 현대시의 난해함에 대한 비판에 대한 변론처럼 삶과 커리어도 '복잡계'라는 마법의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고와 성찰을 포기하고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유튜브를 1.5배속, 2배속으로 보면서 쌓은 것은 'neither knowledge nor wisdom(지혜도 지식도 아니며)' 무제한 요금제와 와이파이가 허락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권태이다.


복잡계라는 딛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으며 배운 인생의 교훈은 rhyme and reason은 무엇을 딛고 있는가를 잊지 않으며,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좋은 사진을 찍는 방법은 오히려 제한된 상황에서도 주위 사물들을 고려하며 준비를 했을 때 나왔다. 인생에서도 중요한 결정은 다가올 미래를 그려보면서, 이전에 결심을 세웠던 나에게 당당해지겠다는 결심. 그 중에서 놓쳐버린 마음을 궁휼히 떠올리며 되실리자는 결심을 할 때 만들어졌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나는 문학의 길에서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의 길로 접어들었다.(심사역, 투자 등으로도 표현되지만 엄연히 다른 영역이고 사실 액셀러레이팅은 더 고도화된 영역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두 길 모두 나엑게는 아름다운 길이다. 브레히트는'아름다움이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행위'라고 이야기했다. '아름다움'이란 어렵게 딛고 있는 복잡계라는 바닥 속에서 이어가는 '돌파'일까, 아니면 딛고 있는 현실과 한계에 대해 눈을 감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유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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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길에서도 그랬듯 액셀러레이팅도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rhyme and reason'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rhyme은 기본적으로(이게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음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 조직이 가진 자원과 장점과의 rhyme > 조직의 장점과 운율을 맞추고 있는가?
2) 나의 강점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rhyme > 나의 강점를 살려서 시너지를 내고 있는가?
3)스타트업이 나아갈 방향과의 rhyme > 스타트업의 호흡과 마일스톤과 결을 같이하는가?

나의 짧은 경험으로는 앞선 요인 중 하나라도 결여되면 rhyme이 부자연스러워진다. 1)이 결여되어 2), 3)이 이뤄진다면 마치 출판사를 잘못 찾은 책처럼 색채가 다르고 '굳이 여기서?' 라는 의문이 이어진다. 2)가 결여된다면 나의 글이 쌓이지 않는다.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이처럼 치명적인 것이 없는 것처럼 액셀러레이터/조직 역시 그러했다. 조직의 장점과 정점에 온도와 각도를 1도라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3)이 결여가 된다면, 대상에 대한 윤리가 지켜지지 않은 문학처럼 아름답더라도 작성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모든 것이 결여되지 않았을 때, 작가와 독자에게 최소한 불편하고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이 되는 것처럼 그러한 여정이 된다.


reason도 유사하게 세 가지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1) 조직의 reason > 조직은 왜 이 액셀러레이팅을 하는가? / 왜 이 스타트업을 해야액셀러레이팅 하는가?
2) 나의 reason > 조직이 나를 뽑은/나의 역할에 맞게 액셀러레이팅 하는가?
3) 스타트업의 reason > 스타트업은 왜 이 액셀러레이팅 받는가? /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역시 위 3가지 중 하나 이상이 결여되면 액셀러레이팅의 의의가 부실해진다. 위와 이유와 부작용은 비슷하다. 불필요한 반복은 줄이고 발전적인 이야기를 위해서 그렇다면 '좋은 액셀러레이팅은?'에 대해서 답해보자. 기본적인 답변은 위의 각각 3가지가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며, 두 개의 조건을 처한 환경에서 일렬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matrix 위의 3x3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더 나아가 입체적으로) 현재의 status를 위치시켜보고 퇴고처럼 하나씩 체워나가다보면 기본에 가깝게는 운영을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보자. 일이 아름다워야 하는가? 나는 그래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복잡계 내에서 좋은 길잡이 별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행에서 매번 배우는 교훈이지만 인간은 아름아움을 경험할 때 현실에서 잠시 원경이 될 수 있다. 뒤이어 조금 흐릿해진 눈을 감고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며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진다. 그래서 삶이 부서진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은 킨츠키 공법의 금처럼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그 자체가 비로소 유일한 아름다움임을 나타내준다. 나는 MYSC에서 배운 rhyme이며 액스트라 마일을 위처럼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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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나에게 준 가장 큰 교훈은 해가 떠 있을 때 가장 밝게 빛났던 것들이 해가 지면 가장 어두워진다는 점이었다. 사막에서 노을을 반사하면서 정말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바다, 한 낮의 모래는 해가 지면 하늘보다도 어두워진다. 그리고 여기를 횡단한다는 생각을 하면 광활한 자연 앞에서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오죽하면 나 역시 가이드에게 '너희는 어떻게 길을 찾니?'라고 물어봤을 정도이다. 그리고 숙련된 투어 가이드들 역시 혼자서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사막을 횡단하던 캐러밴처럼 일렬로 몇 대의 차가 같이 움직인다. 가끔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우리는 스타라고 한다)가 되고 싶어하지만 드물며, 자세히 보면 그리고 자연 앞세 서면 오만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선 액셀러레이팅 역시 사회 문제와 스타트업의 그것을 해결하는 작업이 되고,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 무한게임에 가까운 문제에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은 스타트업에게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액셀러레이터 본인에게도, 소셜섹터를 이루는 많은 사람에게도 무척 필요하다. 아프지만 필요하다는 것은 희박하다는 것이기도 하며, 희박하기에 찾아가야 하며 그 길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유한한 자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유한한 자원들을 소비해서 찾아가야 한다. 스무살 후반을 가득 체웠던 '보람'에는 그런 reason을 고스란히 담아두겠다.


사막에서 돌아오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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