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라이, 세븐시스터즈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서 결국 탈이 났다. 리버풀에서 직관을 마치고 다음날 새벽 버스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돌아가기 전에 항구도 구경하고 비틀즈 박물관도 가고 싶었으나, 리버풀은 돌아가는 날까지 안개를 걷혀주지 않았으며 박싱데이로 인해 휴관이 이어졌다. 원래 계획은 새벽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자고 런던에 도착하면 박물관 투어나 빅벤에서 사진을 남겨보려고 했다. 그런데 우선 문제는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 점이지만, 나는 몸이 수평이 되지 않으면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리버풀에서 런던까지 오면서 거의 뜬 눈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가끔 나타나는 양 떼를 구경하며 돌아왔다.
여행에도 쉬는 날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나는 오래 간직할 것이다. 그 때 당시 아이폰으로 보니 하루에 15km 이상 걸어서 돌아다녔다. 이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자 영국 세 번째 날부터 다리가 아파왔고 주인의 폭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마라톤 완주하고도 괜찮았는데' 라는 생각과 동시에 일정을 떠올려보니, 계속 앉아 있거나 걷거나 서있었지 누워 있었던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했다. '아직 3일이나 더 남았는데, 힘을 내!' 외쳐보기도 하고 군가를 부르며 걸어보기도 했지만 결국 셋째 날은 런던 근교만 여행하고 일찍 숙소로 돌아와서 말 그대로 뻗었다. '아 다음에 해외여행을 할 때 리버풀 <> 런던처럼 긴 이동시간은 되도록이면 야간 버스를 타아지'를 다이어리에 적으며.
덕분에 라이-세븐시스터즈로 떠나는 셋째 날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대학생 때는 100% 내가 찾아가고 즉흥적인 것을 즐겼다면, 최근에는 반조리 형태의 밀키트처럼 반 패키지 상품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완전히 가이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코스와 가이드는 있으며, 그럼에도 각 코스에서는 자유 일정인 상품. 영어/현지어가 가능할 경우, 클룩이나 마이리얼트립 등에서 예약을 해서 애용하고 있다. 특히나 외국에서 길을 헤매면서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체로도 큰 메리트였다.
걸작은 사람이 떠난 뒤에는 세월이 빚어간다. 런던에서도 전통을 간직한 건물이 많았는데, 라이는 더욱 그랬다. 특히나 튜더 시대 양식을 보유한 건물과 몇 백년의 세월을 간직한 숙소와 마차 길까지. 순간적으로 매년 내려갈 때마다 바뀌어가는 내 고향 제주가 떠오르며, '한국과 제주도 이런 전통을 보존해 나갔더라면'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스쳤던 이유는 간단했다. '방치'와 '보존'은 의도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한국에서 '라이'와 같은 곳은 '방치' 혹은 '개발'이라는 양 극단으로 치우쳐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라이에서 오돌토돌한 마차 길을 걸으며 '보존'은 불편한 표면을 애정이라는 신발을 통해 걸어나가며 '최적화'의 길을 우회하는 것임을 느꼈다.
영국 여행은 특정 장소보다, 그 도시만의 분위기와 환경과의 어우러짐이 더 마음에 들었는데 라이 역시 그러했다. 런던의 빅벤, 웨스트 민스터 사원처럼 시그니처인 건물은 많지 않았지만 세월이 빚어나간 해안 도시의 분위기가 묘하게 우중충한 날씨와 조화를 이뤘다.
이후 일정으로 세븐시스터즈에 도착했다.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위해 인간은 그림, 글, 사진까지 발전시켜왔지만 때때로 자연은 인간의 직유를 은유로 만들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처럼 준다. 세븐시스터즈는 영국 남동부의 이스트 서섹스에 위치한 말 그대로 언덕 7개로 구성된 해안 절벽이다. 흰색 절벽이 위의 푸른 초원지대와 해안선의 검은 암석지대와 대비를 이루며 그야 말로 '절경'이다. 특히나 운이 좋아서, '맑은 날' + '일몰' 타이밍에 도착했는데,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컷 수 만큼이나 아름다웠던 동시에, 계속해서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에 사진을 고르는 과정에서 보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찍었다. 거의 매일 이곳에 온다는 가이드 님께서 '이런 날을 만날 확률은 10% 미만'이라고 할 정도로 귀중한 순간이었고 리버풀 경기 직관 만큼이나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꼽을 만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A컷'을 골라내며 런던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한 '약속'으로 한국에서 유학을 왔던 두 명의 친구들을 만나는 일정이었다. 이전에 대외활동을 하면서 같은 팀을 이뤘던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와 이렇게 만나네'라고 연신 이야기했다. 그렇다. 이번 저녁은 내가 영국 여행을 떠날 확률에 또 다른 두 명의 친구가 각각 영국과 네덜란드로 유학을 와서 살아 남아(?) 마주한 확률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심을 하게 만든 상황과 확률을 생각해봤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처럼 천문학적인 확률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결국 인간은 아득하고도 기적 같은 확률을 '인연'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근황과 한국과 영국, 네덜란드의 사회/문화 차이에서까지 이야기 나누며 밤이 깊었다.
올해에도 아마 '나의 친구를 찾아서' 여행은 이어질 것 같다. 친구는 여행의 좋은 핑계(?)가 되어준다. 투자와 복리의 세계에 사는 나에게, 여행은 죄악에 가까웠다. 그러나 친구가 그 나라에서 유학이나 일을 하면서 머무를 때, '그래, 친구가 있으니 가지 아니면 평생 언제 가 봐'라는 생각이 내게는 여행을 결심하게 만드는 큰 계기 중 하나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