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N페르소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반장 Jun 27. 2023

가무래기의 낙

  시린 바람에 소주가 달다. 연말 연초에는 마음이 이상하다. 내 자리는 어딜까.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나는 왜 더 나아가지 못할까. 기대하고 실망하는 마음이 종일 진눈깨비로 내린다. 방울 소리 같은 얄팍한 소문에도 들썩이다가 고독이 짙은 밤에는 무겁게 가위눌려 잠을 못 이루니, 이건 뭐 귀신에 씌었대도 할 말이 없다. 돌려받을 빚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받지 못해 서운하고, 빚진 사람처럼 뭐든 해야 할 것 같아 분주하다. 애쓴 건 억울하고 애쓰지 못한 건 후회스러워 멧비둘기가 되어 꺼이꺼이 운다. 나도. 구구. 한 잔. 구구. 주소. 꺼이꺼이.
  아, 나는 괜찮다. 언젠가 ‘괜찮습니다.’를 세 번 외친 적이 있다. 죽으러 간 사람을 찾아다니던 지난 겨울이었다. 영상 속에서 검정 봉지 하나 달랑 들고 걸어가던 남자가 허연 뒤통수만 내놓고 산을 오를 때, 망연히 바라보던 우리도 산에 올랐다. 영하의 날씨에 젖은 양말 바꿔 신을 틈도 없이 861명의 경찰관과 소방관, 47두의 개가 겨울 산을 오른 지 어언 한 달. 우리는 바위 뒤에서 목을 맨 남자와 초저녁 대나무숲에 숨어 잠든 여자를 찾아냈다.
  두 번째 자살기도자를 찾은 날, 길도 없는 산비탈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날랐다. 하나의 생명이 꺼진 자리에 지역 경찰과 형사, 검안의를 부지런히 데려다 놓기를 몇 번, 산길 초입에서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러 넘어졌다. 바스러진 낙엽이 미끄러워 머리통까지 푹 꺼지다가 겨우 마른 뿌리 하나를 잡고 일어서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그 해 마지막 날엔 내 작은 골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선물 받은 ‘부산밤술’을 홀짝이며 여자가 죽으러 간 길에서 구르며 느낀 살아있는 감각의 이질감을 기억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운명은 평등하게 바스러지는 저 낙엽과도 같을 텐데, 흙을 묻히며 굴러떨어지는 몸의 감각은 왜 이리 아픈가. 들러붙은 흙을 털고 일어나며 분리되어버린 그 여자와 나 사이는 얼마만큼 먼가.
  살아남아서, 눈보라를 맞고도 시절의 관문을 열고 나아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세계적인 괴테 연구가 전영애 씨는 “사람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 마지막 걸음을 못 내디디게 뒤로 불러들이는 것”은 “유년 시절 사랑의 기억”이라고 말했다. (다큐 인사이트 「인생정원-일흔둘 여백의 뜰」)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가로막고 있을 때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어린 시절 경험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그림 책방에 가서 다 큰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 같은 것. 어렸을 적 심통이 나면 엄마가 베란다의 꽃을 보여줬다던 동화책을 흘깃 보고 떨구는 눈물 한 방울이나 죽은 엄마가 휴가 나오면 ‘숨겨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억울했던 일을 /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고 소리 없이 중얼거리는 시 한 편처럼, 별 볼 일 없이 초라한 나로 오늘 하루 살아갈 용기를 내게 하는 그런 것. 부조리한 세상사 쓰라린 일 투성이라도 여린 것에 웃음 짓고 살아가게 하는 그런 것. 나만 아는 서러운 일에 부서져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살아있어서 당연하게 누렸던 진주같이 영롱하고 순수한 감정.
  낙엽처럼 흩날리다 바스러지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는 빛나는 진주가 있다. 나에게도 있고, 생의 마지막 걸음을 내딛는 이에게도 있고, 가무래기에게도 있다. <가무래기의 낙>에서 가무래기는 모시조개다. 가난한 시인이 빚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걸’ 어떻게 알고 편들어대는 가무래기 덕에 시인의 ‘마음은 우쭐댄다’. 빚도 못 얻은 그 섧은 마음이 어땠겠냐며 되레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하는 가무래기는, 시린 시장바닥에 누워서도 남몰래 진주 한 알 품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축축한 흙이 여전히 손바닥을 까슬하게 간질인다. 마른 뿌리라도 잡고 일어났으니, 이제 나는 가무래기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권위에 승인되고 주류에게 다듬어지고 대중에게 전시되지 않은, 심부에 박힌 진주가 알알이 빛나니 기꺼이 가무래기가 되어도 좋은 것이다. 멧비둘기처럼 꺼이꺼이 울다가도 당신을, 우쭐하게 할 수 있어 좋은 것이다.

<가무래기의 낙>  -백석-

가무락조개 난 뒷간거리에
빚을 얻으려 나는 왔다
빚이 안 되어 가는 탓에
가무래기도 나도 모두 춥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내 마음은 우쭐댄다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
이 추운 세상의 한구석에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걸
얼마나 기뻐하고 락단하고
그즈런히 손깍지 벼개하고 누워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가무락 조개, 가무래기: 모시조개
*능당: 응달
*락단하다: 무릎 치며 좋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죽허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