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가 나를 미워하는 날이었다. 떡볶이집에서는 친구가 울었다. 그녀는 아무리 애틋한 가족의 연이라도 버거울 때가 있다며 서러워했다. 친구와 헤어지고나서는 모르는 할아버지와 언쟁을 벌였다. 할아버지는 왜 킥보드를 남의 집 앞에 세우냐고 호통쳤는데, 좁아터진 골목길에서 혹여나 사람들 통행에 방해될까 쓰러져 있던 공유 킥보드를 잡아 세운 것이 화근이었다. 강연장에 도착해서는 변소에 갇혔다. 푹푹 찌는 7월의 마지막 날, 오가는 사람 없는 외부 화장실, 길지도 않은 내 무릎만으로 꽉 차는 칸이었다.
불과 30분 사이의 일이었다. 알싸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르고, 눈물이 찔끔 났다. 자잘한 불행이 휘몰아쳤지만, 다행히 나는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기에 자잘한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기이한 30분을 기억한다.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가 나의 장송곡이 될 뻔 했던 그 순간을.
30분 동안 나는,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2층 떡볶이집에서 말없이 떡볶이를 권하던 친구이자, 남의 집 앞에 함부로 킥보드를 주차하는 무례한 인간이자, 다급하게 화장실 문을 열었던 사람을 악의없이 놀라게 한 불쌍한 인간이었다. 각각의 인간은 나를 만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박제되었다. 나는 나를 통과한 타인들이 오고 가는 길에 기억의 편린 한 조각씩을 손에 쥐어 줬고, 이미 타인에게 줘버린 순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권리가 없다.
기억은 뒷담화와 같다. 대상이 부재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박제된 대상과 원 없이 나누는 대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본질적으로 뒷담화든 기억이든 주체의 인식 수준과 경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사적으로 해석한 기억과 그에 기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동반한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가 말했든, 뒷담화는 인간 혁명의 산물이 아니던가. 한 사람을 기억하는 타인들이 모여 상호주관성을 강화하다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은 거대한 진실의 드라마가 된다. 그렇게 내 안의 오해가 이해로 변모하는 이야기가 바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뒷담화하는 이야기이다.
화자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이십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한 사회주의자였다. 혼돈의 시절에 사상으로 아버지를 잃고 동생과 반목하며 후손의 앞길을 막았지만 그는 끝까지 민중의 일이라면 '오죽하먼!'을 외치는 민중의 호구이기도 했다. 오죽하먼 그랬겠냐고 벼룩 있는 방물장수에게 딸의 방을 내주고, 오죽흐먼 그러겠냐고 모내기는 내팽개치고 한밤중에도 남의 사위 교통사고를 처리하러 가고, 오죽흐믄! 보증 서준 친척이 야반도주 할까 싶고.. 그녀에게 아버지의 진지함은 우스꽝스러운 유머일 뿐이었다.
죽음조차 그랬다. 아버지는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필시 그 마지막 걸음은 혁명적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냉소는 아버지의 장례식 동안 아버지의 다른 순간을 기억하는 타인들에게 뜯기고 찢겨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장례식장에서 오고 가는 인연들은 딸에게 아버지와의 기억조각을 하나씩 쥐어주었고, 딸은 아버지의 '오죽하먼!'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또래에게 내몰리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의 친구가 된 아버지, 원망받기만 한 줄 알았는데 실은 존경받았던 아버지, 그리고 총 든 군인 보다 어린 딸의 맹랑한 눈빛을 더 두려워했던 아버지가 씨줄과 날줄로 드리워졌다. 거기에 아버지가 불탈 때 어머니가 털어놓은 채신머리 없는 잠자리 고백은 나바호족이 러그를 짤 때 어울리지 않는 실로 도드라지게 넣는 영혼의 줄*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오죽하먼!'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캐묻지 않아도 그 만의 사정이 있었을 거라 헤아리는 마음.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을까.' 그런 사심 없는 상상들. 어린 나이에 동무와 가족을 잃고, 고문으로 사가 되고, 오래도록 감옥에서 살았어도 끝끝내 호구같이 여린 마음을 잃지 않았던 아버지의 삶은 결코 유머라고 할 수 없었다. 생전에는 헤아리지 못한 아버지의 사정이 타인의 시선으로 푸른 포도알처럼 생생하게 드러나고, 딸은 사상, 신념, 역할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 아버지를 만났다.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변명도, 해명도 할 수 없는 지금에서야.
p265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쥐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을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누구의 기억도 완전하지 않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혼돈이라 회오리치며 역동하는 세계에서 내가 아는 것도, 보는 것도 우주를 부유하는 모래알 같기만 하다. 어느 여름날 울고 있던 친구와 심통 난 할아버지와 소변이 마려웠던 어떤 사람이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담뱃불만 한 불행에도 흔들렸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누구에게나 불행은 닥칠 수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시절의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으며, 불행 앞에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욱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때로는 상처를 주고, 또 받을지라도 타인의 불행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절망의 얼굴에 품위를 요구하지 않고 싶다. '오죽하먼' 그랬겠나!
* 게일 콜드웰 <먼 길로 돌아갈까>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