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N페르소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반장 Nov 03. 2024

리얼리티 트랜서핑 1~3권 읽고

자유와 니체, 그리고 라캉

<리얼리티 트랜서핑1~3>을 읽는 내내 니체가 생각났다.  <우울한 날엔 니체>를 다시 읽고 싶었다. 2022년에 매주 사람들과 함께 한 챕터씩 읽었더랬다. 그때마다 한껏 고양된 감정을 느꼈다. 다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싶다.

펜듈럼(진동추)은 인간이 사로잡힌 에너지의 장이다. 펜듈럼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인간은 자신이 사로잡힌 펜듈럼의 현실트랙을 따라 살아간다. 인간이 펜듈럼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지만 특정 펜듈럼을 선택할 수는 있다. 대부분의 펜듈럼은 인간의 사념을 자극하고 반응하게 하여 인간의 에너지를 빼앗는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추와 같이 고통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한다'라고 말했다. 파괴적 펜듈럼의 작동방식을 정확히 설명한 문장이다.

책에서는 말한다.
"파괴적 펜듈럼에서 벗어나라. '중요성'에 현혹되지 말라. '중요성'을 지키든 부정하든, 그로 인해 촉발된 감정, 생각, 행동은 모두 그 펜듈럼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펜듈럼과 싸우지 말고, 반응하지 말고,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라. 당장 변할 수 없다면 잠시 빌려주라. 욕망과 집착은 내려놓고 오로지 의도로 행동하라. 필요한 것은 모두 지금 여기 있다. 영혼의 개성을 발산할 펜듈럼이 스스로 문을 열리기를 선택하라."

평범한 인간은 관습과 문화가 만든 에너지에 순응해 자신을 잃어버린다. 니체가 말하는 노예도덕과 비슷하다. 노예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반응이다. 노예도덕의 논리에서는 허약함이 장점이 되고, 무능력이 도덕이 되고, 두려움이 결손이 되고, 무기력이 인내가 되고, 복수가 정의가 된다.

이와 반대로 군주도덕은 힘의 의지를 높여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모든 일에 회의를 품는다. 회의하면 허무하게 되지만, 힘 있는 인간은 자신 안의 혼잡하고 야성적인 에너지를 자각하고 그 상태를 견딘다. 그에 따라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원한과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망각하고, 어린아이가 된다.

군주도덕을 창조하는 자는 결단 이후에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스스로 세운 도덕이 완전히 무의식에 녹아들도록, 즉 지식을 체화하여 본능으로 만들도록 하여 결단의 속도를 높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군주도덕을 무의식에 녹아들게 만들 수 있을까. 정신분석이 그 방법 중 하나이지 않을까.

<백상현 교수님의 '쾌락의 원칙' 강의에 따르면>
현시대는 '햄릿'들의 시대이다. 신의 교리를 담지하던 아버지의 법이 망령이 되고, 삶도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허공에서 햄릿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자'이다. 현대인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신의 그림자를 옮겨 다니며 소비하는, 화려한 펜듈럼 속의 존재들이다. 얕은 지식과 얄팍한 규율을 진통제 삼아 부지런히 허무의 고통을 잊는 욕망의 주체들이다.

허무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주체적으로 창조한 새로운 믿음, 즉 진리이다. 자아심리학 파는 자아의 힘으로 증상을 극복하는 데 목표를 두는 데 반해, 라캉은 '타자의 욕망으로 짜인 언어'라는 무의식의 거미줄에서 진리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그물망은 아버지의 권위로 기능하는 남성적 관습이고, 진리는 그 안에 숨어 있는 여성의 수수께끼이다. 진리는 반만 말해지며, 공백을 가져온다. 공백으로서의 진리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 없는 믿음, 즉 '매혹'의 문제이다.

진리를 믿는 자는 내면의 갈등이 없다. 나르시시스트도 일견 갈등이 없어 보이지만, 나르시시즘과 진리는 다르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엔 외부가 침투할 공백이 없다. 오로지 자신이 취할 기쁨과 추방해야 할 외부로 나뉜다. 외부를 방어하지 못하고 통제력을 잃으면 감정기복을 동반한다. 진리는 고집스레 지켜야 하는 안락한 감정이 아니다. <리얼리티 트랜서핑>의 방식대로 설명하자면, 진리는 마음(정신)과 영혼이 믿는 진실이 일치하여 누리는 편안한 상태이다.

진리는 무의식에 숨어있다. 증상은 무의식을 드러낸다. 증상을 통과해 삶을 조종하는 진실을 구할 수 있다. 증상은 지식체계에 뚫린 구멍이다. 일상의 균열이자 불가해한 고통이다. 증상 속에  깊이 추락하여 진리를 구하면, 깨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펜듈럼에서 욕망의 층위를 해석하고 무분별한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는 아무리 덜어내도 다함이 없다. 진리도 인간을 소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 이전의 소리로 '살아서 춤추라'라고,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라고 매혹한다. 그때 찾은 길은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경제적이지도 효율적이지 않아 보일지라도, 결국 가장 큰 쓸모가 된다. 실수도, 실패도, 방황도 신의 계획 아래에 있다. 끝없이 영감이 차오른다. 그것이 영혼이 원하는 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읽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