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로 이 말을 해줄게.
그 말을 왜 이제 해?
예전에는 네가 이해를 못 하는 거 같았거든.
촛불이 꺼졌다. 오래도록 곁에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다급하게 읽어치웠던 몇 권의 책들, 상실감을 이해해 보려 듣고 있는 강의, 이해하려 애썼던 글들이 모두 내 곁에 있었다.
진리는 단순해.
오랜 침묵 속에서 검을 쥐고 싸워온 것이 무엇일까. 화려하지도, 조급하지도, 애써 달려가지도 않으며 세상의 속도에 아랑곳 않고 타인의 혀가 베는 열등감을 걷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조금 뾰족하고 구멍 난 것 같아 보여도 타인이 직조한 사회의 그물망을 벗어나면, 그 자체로 온전하다. 타인에 대한 평가는 내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어쩌면 타인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나의 세계를 넓혀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요약한 오만이었다. 무지했다. 불교에서 무지는 악이다. 살아있는 걸음마다 업보가 쌓인다.
오늘 나는 무력했어.
침묵으로 도피한 아이가 문신한 남자의 애정을 믿고 가출했다. 문신한 남자들은 아이를 둘러싸 보호하며 아이의 감정을 자극했다. 아이는 10명의 경찰관 속에서 항의하며 집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는 경찰의 생리도, 쉼터의 생리도 뻔하다고 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더 이상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 말을 들었다. 기어코 남자친구 없이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여 껄렁한 남자들 셋과 함께 앉아 말을 들었다. 수치심과 열등감을 자극해서는 안된다. 아이가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기다리되, 적절한 자극으로 말문을 열어야 한다.
잠시 남자들이 나간 사이 아이는 말했다. 사실 오빠가 장애가 있어요. 아빠는 매일 술 먹고 집에 와서 오빠랑 싸워요. 무서워요. 엄마는 8시만 되면 집에 오래요. 매일 밤 폰을 뺏겨요. 친구들한테 쪽팔려요.
남자들이 돌아오자 아이는 다시 돌아왔다. 시시덕대고, 남자친구 없이는 엄마도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엄마는 주저앉아 울었다. 남자에게 빌었다. 아이는 엄마가 남자친구를 허락해 주길 바랐다. 희망은 깨졌다. 아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시 말문을 닫았다.
상담기관으로 가는 길, 엄마는 내게 하소연했다. 맞아요. 제 살을 찢고 나온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엄마 마음을 어찌 알겠어요. "애가 철이 없어요." 어머님, 이 어린아이가 철드는 게 이상하죠. "애가 말을 안 해요." 제 욕구를 말하고 싶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나요. 아이 마음이 불편했나 봐요.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상담기관에 도착했다. 아이를 보내고 엄마에게 당부했다. 중3부터는 부모의 잔소리로 아이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소용없습니다. 차라리 지지해 주세요. 정도가 심해지면 가정법원의 도움을 받으세요. 보호처분을 받아야 저희가 아이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놓지 마십시오. 아이는 몇 번 더 이런 과정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돌아옵니다.
엄마는 울었다. 엄마를 안았다.
아이의 편도, 엄마의 편도 될 수 없지만 매 순간 진실하자 다짐한다. 나는 그들에게 선도, 악도 아닌 질서다. 진심만으로 그들을 구할 수 없다고, 잔뜩 화난 인간들과 종결사항에 혼돈을 끼워 맞춰야 하는 경찰관들이 각기 생선처럼 팔딱대는 현장에서 내 말은 흩어질 뿐이라고, 느끼면서도 무력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말 한 조각뿐이라도 진심을 다해 애썼다. 그거면 다했다. 그것이 진리다.
아이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출근하면 레드카펫이 깔려 있을 줄 알았어. 오늘 내 생일이거든. 나는 오늘 너와 만난 걸 선물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하여
이번 생일에 내가 받은 선물은
영혼의 이정표,
현장의 혼돈에서 건져낸 희망,
돌아갈 수는 없지만 간직할 수 있는 동심,
이 자리에서 기쁘게 향유할 수 있는 향기,
그리고 어딘가 좀 이상한 내 곁에 이토록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