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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Mar 24. 2022

핫케이크를 굽는 기분으로

대체로 괜찮은 하루를 차곡차곡

“휴. 나도 방학 끝나기 전에 저런 놀이동산이나 큰 키즈카페 가보고 싶다.”


올 것이 왔다. TV에 나오는 화려한 놀이 공간을 보고 아이들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이 동네엔 갈만한 데가 하나도 없는 걸. 게다가 개학은 이틀 앞으로 다가왔는 걸! 너희 이사 오기 전에 더 어렸을 때 많이 가봤는데 뭐, 하는 소리는 초등 저학년 아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없단 걸 안다. 낯선 도시로 갑자기 발령만 나지 않았어도 우리는 지금쯤 높은 타워 옆 빙글빙글 도는 대형 놀이기구 의자에 안착해 있을 텐데. 어차피 감염병 때문에 어디에 있든 자유롭게 다니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래도 선택지가 아예 없는 거랑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나까지 괜히 입을 삐죽거릴 뻔했다.

오래 살던 동네와 부모 옆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발령 소식을 듣고 며칠간, 툭 치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익숙한 공간과 사람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막연한 걱정인지 외로움인지 모를 것들이 뒤섞여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마음이야 어떻든 삶은 여전히 진행형이라, 새로운 터전에서도 2년이란 시간이 성실하게 흘렀고 이곳에서의 기쁨도 여럿 찾았지만 아쉬움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여기의 갯벌도 좋아했지만, 자신들이 한동안 접하지 못한 것들을 부러워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도 종종 내 옆에 없는 것들이 그리우니까. 꼭 너희가 말한 곳은 아니더라도 갈만한 데를 엄마가 찾아볼게, 하며 말끝을 흐리는데 아이가 느닷없이 말했다.     


“어제 봤던 만화에 나온 거! 괴물이 먹었던 핫케이크. 그거 먹고 싶다.”     


만화에 나왔던 거라면 가만 보자. 잭이 콩나무 타고 올라가서 만난, 구름 위 거대한 성에 사는 그 괴물 말이지? 층층이 올려진 핫케이크에 네모난 버터 한 조각이 놓여있는, 시럽이 줄줄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핫케이크를 얘기하는 거지? 아. 내적 갈등이 인다. 뭔가를 만들기는 왠지 귀찮은 마음, 근데 또 나른한 방학 끝물의 오후에 폭신한 핫케이크 한 입 베어 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마음이 맞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번거로운데 마침 집에 온갖 재료가 완벽하게 있는 건 정녕 운명일까... 두 마음이 격렬하게 싸우다가 마침내 이긴 마음이 말했다.     


“해 먹자! 놀이동산은 못 가줘도 핫케이크는 구워줄 수 있어.”


핫케이크 믹스와 시럽. 계란, 버터, 얼마 전 사다 놓은 스프레이 생크림까지 모두 있으니 준비는 끝났다. 눈대중으로 대충 부었다가 망쳐버리면 나도 아이들도 돌이킬 수 없는 기분이 될 것이 뻔하니, 믹스 포장에 쓰인 조리법 그대로 오차 없이 반죽을 만들기로 했다. 실리콘 솔은 이럴 때 써야지 하며, 팬에 기름도 솔솔 칠했다. 핫케이크가 보름달처럼 넓적하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한 국자가 안 되게 쏘옥 떠서 동그라미 두 개를 만들었다. 지금부턴 눈을 떼선 안 된다. 타는 건 찰나니까. 갈색빛을 띠면서도 노릇노릇하게, 언젠가 디저트 카페에서 봤던 모양 그대로 나오길 바라면서 약한 불에 인내를 담아 기다린다. 뒤집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뽁, 뽁, 기포가 보이는 바로 그 때! 여러 번 뒤집을 일 없게 뒤집개로 살짝 들어 바닥면을 흘깃 보고 눈치싸움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뒤집는 것이 관건이다. 그 후엔 팬이 이미 달궈져 있어서 금방 타기 쉬우므로 너무 오래 두어선 안 된다.

긴장 속에 구워진 핫케이크를 한 장 한 장 민트색 접시 위로 옮겨 올렸다. 착 착 착. 신혼 때는 이거 한 장 예쁘게 굽는 게 어려워서 여러 번 눌어붙거나 새카맣게 타곤 했었는데 10년 동안 그래도 내공이랄 게 조금은 생긴 걸까? 약간씩 그을러 얼룩이 생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놀노리한 핫케이크를 한 장씩 접시에 쌓을 때마다 왠지 모를 으쓱함이 같이 쌓여갔다. 뭐야, 나 오늘 좀 멋진 것 같아! 역시 굽길 잘했어!


“엄마, 엄청 좋은 냄새 나!”


빵집에서나 날 것 같은 따뜻한 냄새에 이끌려 세 아이가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온다. 버터 한 조각에 살 좀 쪄라, 설탕 한 숟가락에 식욕 좀 돌아라, 시럽 한 바퀴에 놀이동산 못 가 아쉬운 마음 좀 나아져라, 염원을 가득 담아 달달하게 곁들여주었다. 여섯 층으로 쌓아 올린 핫케이크를 보더니 아이들은 어제 만화에서 본 거랑 똑같다고 신기한 듯이 말했다. 더 예쁘게 꾸며줄 블루베리와 딸기는 없었지만 뭐, 없으면 없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아들, 우린 이걸로도 충분하잖아!


아이들이 각자의 앞접시로 핫케이크를 하나씩 옮겨 신나게 먹는다. 나도 뱃살 걱정은 잠깐 접어두고 한 장을 덜어 버터와 생크림 슥슥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다. 따뜻해, 달아, 폭신폭신해! 마음까지 괜히 포근해진 건 부드러운 핫케이크 때문일까, 만족스러워하는 아이들의 웃음 덕일까, 오늘의 할 일을 근사하게 해냈다는 뿌듯함 때문일까?

손에 잡히는 아무 과자로 아이들 간식을 때우는 게 보통인 나지만, 그날은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걸 만들길 정말 잘했다. 요리 고수는 아니지만, 만화 속 핫케이크를 흉내 낼 정도는 되어서 다행이다. 못 데려가는 곳에 미련을 갖느니, 부러워하고만 있느니, 뭐 하나라도 오늘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해보는 편이 나았다. 갑작스러운 이사도, 예상 못한 역병도, 아직 만나지 않은 수많은 변수도 있는 인생이 날마다 대단하고 즐겁고 보람찰 순 없겠지.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조그만 성취를 모으고 당장의 할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 나는 그렇게 적당한 만큼의 하루하루를 기분 좋게 쌓고 싶다. 착 착 착. 그날 내가 구워 올린 ‘대체로 노릇한’ 핫케이크처럼!

   



괴물이 먹은 그 핫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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