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스럽다. 드디어 결혼한다!
남자 친구와 2018년에 처음 만났는데, 벌써 4년이 지났다. 4년 동안 나는 꽤 많이 변했다. 소주 4병씩 마시던 술고래에서 맥주 4잔에 잠드는 술찔이가 되었다. 친구들과 여럿이 노는 걸 좋아했는데, 이제는 남자 친구랑 둘이 노는 걸 가장 좋아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위태로웠던 나는 이제 내 꿈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남자 친구는 4년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휴대폰에 저장된 4년 전 영상에서도, 3년 전 영상에서도, 바로 어제 찍은 영상에서도 말투, 표정, 목소리까지 다 똑같다. 늘 처음처럼 다정하고, 재밌다. 연애하는 동안 꿈이 시시때때로 바뀌었던 나와 달리 오빠는 늘 같은 꿈을 꿨다. 그 우직함이 나를 변화시켰다.
씩씩한 척하느라 외로웠던 나는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무장해제되었다. 신세를 한탄하기보다는 '나'를 변화시키는 편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은 '의지'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사람들도 다 나처럼 생각하고 살면 내가 내뱉는 고민을 한심하게 여길 것 같았다. 나를 옥죄이는 불안한 마음을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했다. 가끔 숨기고 싶은 내면을 다른 사람이 꺼내려고 하면, 마음을 먼저 닫아버렸다.
그래서 내 연애는 늘 빠르게 끝났다. 친구들이 나를 "1일은 있어도 100일은 없는 여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친구 관계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매일 연락하고, 자주 만나야 하는 남자 친구에게는 선택적으로 나를 보여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지낸 20대는 숨만 쉬어도 불안한 삶이었다. 학생 때부터 좁은 공간에서 지냈기에 원룸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취업 후에는 적은 월급에도 복층과 테라스 있는 방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 내 집은 마련할 수 있을까?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도 사치처럼 느껴져 좀처럼 삶이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놀면서도 머릿속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털어놓고 싶지 않아, 그냥 바쁜 척하고 집에서 쉬었다. 전 남자 친구들은 항상 "네가 날 좋아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며 이별을 고했다.
늘 사귀고 헤어지고의 반복이었다. 오빠를 만나기 전 나한테 연애는 '재밌지만 귀찮은' 일이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진득한 연애를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남자 친구를 만나고 완전히 바뀌었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싫으면 헤어져." 마인드에서 "난 오빠가 제일 좋아. 오빠가 싫은 거 안 할래"로 변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인정. 지금의 남자 친구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이다. 이쁜 모습, 밝은 모습뿐만이 아니라 외롭고, 불안한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 이해해줬다.
그래서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었다. 힘들 때 숨어버리는 대신 도와달라고 펑펑 울 수 있었다.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불안한 마음을 마주하고 동행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모든 게 편안해졌다. 힘든 일이 생겨도 혼자만의 방으로 도망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열심히 살다가 번아웃이 왔을 때도, 나태 지옥에 빠졌을 때도 오빠와 함께였다. "나 요즘 또 고민 있는데(주르륵)", "나 왜 이렇게 열심히 안 살지?(현타)" 이런 고민을 나누는 일이 편해졌다. 예전에는 한 달씩 잠수 타야 할 만큼 버거운 일도 이제는 가볍게 툭툭 털고 일어날 체력이 생겼다.
그래서 남자 친구를 만나는 동안 한 번도 다른 여자가 부러웠던 적이 없다. 이상순, 최수종 등 내로라하는 사랑꾼이 티비에 나와도 부럽지 않았다. "오빠는 왜 저런 거 안 해줘?" 하고 따져 물을 일이 없었다. 항상 그 이상으로 나한테 잘해주는 남자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꾼이 나올 때마다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을 사귀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오빠 볼 한 번 쓰다듬어 준다. 그러면 "왜!? 또 뭐 필요해?!(째림)" 이러고 나를 쳐다보지만 그것마저 귀엽다.
우리가 결혼하는 내년에 오빠는 36살, 나는 32살이 된다. 2년 전 내가 결혼 대신 이직을 선택하며 한 차례 미뤄져서 우리는 나이가 많은 신랑 신부가 된다. 그래도 좋다. 2년 전에 결혼했으면 지금처럼 다이내믹한 인생을 경험하지 못했을 거다. 도전하고 성취하고, 실패하고 다시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인생 드라마 한 편을 썼다.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도전하며 성취하며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귀여운 자존감을 갖고 살았다. 난 하고 싶은 일은 다했어!라는 말 안에는 실패할까 두려워 도전하지 못한 일에 아쉬움이 있었다. 이제는 아쉬울 것 없다. 정말 마지막으로 30살에 이직을 꿈꿔봤고, 이미 기차는 떠났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이 가볍다. 난 해도 안된다는 패배감 대신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성공할만한 일에만 도전하며 쌓았던 작은 모래성을 부수고, 과분해 보이는 꿈을 꾸며 튼튼한 벽돌집을 짓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할 때가 왔다. 결혼한다. 4년 동안 한결같았는데, 결혼하고 갑자기 바뀌면 안 된다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