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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전신간 Jan 05. 2024

똑똑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흐릿해도 흥미롭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과연 그래서 샀을까?


    화장품이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지난 수십 년 간 계속 나왔다. 강력 보습이라는 게 진짜냐, 같은 것들을 입증해 보라고 요구받은 신제품들은 저마다 미백, 주름 개선과 같은 기능성은 당연하고 미세 먼지 제거, 혹은 128시간 보습과 같은 신박한 효과를 하나씩 추가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몇 년 전 급부상한 데이터 산업 덕분에, 앞으로도 이런 놀라운 효과와 연구 결과들은 더욱 정밀해질 것이며 새 시대 화장품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추가될 것이다. 그런데, 과학 기술이나 데이터 분야가 발전하는 것과 화장품의 효과는 관련이 없다.




사흘 동안 세수  하는 사람도 있나


어떤 제품의 상세페이지 내용(출처: 구글 검색)

    세상에, 72시간이면 무려 3일이다. 숫자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저 정도의 지속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심지어 실험 조건과 과정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제품은 아주 잘 팔렸으며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객관적 수치, 그러나 따져보면 살짝 비합리적인 근거. 하지만 소비자는 납득했다!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행복한 결말이다.


도 제품 개발할 때 4시간, 8시간 지속 테스트를 임상 기관에 수시로 의뢰했다. 메이크업 제품은 당연히 지속 시간이 길수록 소비자 반응이 좋다. 임상 기관마다 다양한 테스트 방법이 있지만 가장 직관적인 방법 하나는 다음과 같다.


아이라이너의 경우 물과 기름, 마찰에 잘 지워지지 않는 필름 효과의 성분이 들어있다. 사람 피부 모사체에 제형을 발라두고 물과 마찰 등에 노출시킨 후 바르지 않은 것과 대비해서 잔존율을 계산하면 그게 곧 워터프루프 테스트 결과이자 지속력이 된다. 나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이다.


물에도, 문질러도 안 지워진다고 직관적으로 보여준다.(출처: 구글 검색)



이유? '그냥'


    실제로 사람의 피부 조건과 유사하게 구성하기도 했고, 특별히 수치가 잘 나오게끔 변수를 추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간결하고 명확한 데이터라 하더라도, 미래에는 점점 그런 결과가 이 화장품이 더 좋은 품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다.

내가 이 제품을 산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샀다. 단지 조금 지루해서 어디 새롭고 예쁜 신상 없나 궁금할 뿐 제품력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데이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단지 제품력을 입증하는 데만 쓰인다면 숫자나 데이터 자체는 화장품 영역에서 점점 그 힘이 약해질 것이다. 72시간 보습 크림을 바른 뒤 3일 후 피부 수분도측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느낌 상 이전보다 얼굴이 부드럽고 촉촉하면 ‘크림 덕분인가’ 어렴풋이 떠올리고 말 뿐이다. 똑똑한 AI는 제품의 지속 시간에 대해 어필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사람의 의도와 의중, 기분을 읽어낸다. 그걸 지금 우리는 알고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튜브는 이러한 알고리즘에 따라 영상을 추천한다고 한다.(이미지 출처: 하단 기재)



나 자신의 알고리즘에 인도당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 탓에’ 객관적인 검증과 데이터에 의거한 의사 결정이 앞으로 잘 자리 잡을 분야 중 하나로 생각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제품의 영역에서나 그렇다는 이야기지, 사람의 영역에서 똑같은 스탠스를 취한다면 성장이란 없다. 제 아무리 객관적인 결과를 제시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비자는 사람이다.


정말 똑똑한 AI는 최적의 효과를 가진 화장품을 만들어주는 AI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화장품을 만들어주는 AI가 똑똑한 AI다.
내가 내일은 뭘 바르고 싶어 할지, 아마 알고리즘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똑똑한 친구는 내가 오늘과 또 다른 선택, 심지어 컴퓨터의 입장에서 보면 러(error)에 해당하는 아주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예측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 양상이 그런 것이니, 인공지능에게 간파당했다고 분개하거나 배척할 필요는 없다.



결국 과거 나의 흔적들이 모여서 현재의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머신러닝은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두어주었다.(출처: 구글 검색)



이상한 놈이 살아남는다


    화장품은 주관적 선호가 강하게 작용하는 상품이다 보니, 비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충동 구매가 쉽게 일어난다. 또한 사람이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에 연구로 밝혀지기도 했다. 사람의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화장품 산업, 화장품 시장인 것이다.


최후에 남는 것은 정의도, 교활함도 아닌 바로 엉뚱함이었다.(출처: 구글 검색)  


사람의 변덕까지도 하나하나, 정공법으로 모두 학습한 인공지능이 마침내 사람의 바보스러움까지도 학습하면 우리는 과연 더 이상 비합리적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모든 계산 끝에 사소한 변덕마저 <알고리즘 제4571번>으로 정형화되어버리고 나면 더 이상의 돌연변이, 이상한 놈은 나타날 수 있을까?


이런 것도 알고리즘이라면 사실 AI는 유머 감각까지 학습을 마친 것 같다.(출처: 구글 검색)


    옛날 한 동네에 바보가 살았다. 그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한 스님이 "저 바보 천치 한 명이 자네들 열 명의 머리를 합친 것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하다네."라고 말했다. 과연 그 이야기가 전래된 이래로 수 백 년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모르는 사람보다 한참 바보가 됐다.

 

모든 수를 다 읽히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런 수도 두지 않았으므로, 역설적이게도 알고리즘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우며 그의 지배로부터 승리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우리는 모두 똑똑하다. 고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자. 사람끼리는 그러지 않더라도 최소한, 머신러닝의 알고리즘이 해석할 수 없는 만큼만이라도.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W&Whale의 R.P.G Shine 공연 모습(출처: 구글, 유튜브)


    이 노래가 나온 건 2002년이다. 당시에 이 가사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갔다. 새파란 어린애였으니 당연하다. 이후로도 종종 노래가 생각나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생각해보곤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가 명확한 발표자보다, 나중에 각인되는 건 흥미로운 발표자란 걸로 이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알맹이는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20년이 넘은 이제야, 가사 내용을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미지 출처


https://maily.so/marsinmarine/posts/6b6f28

https://maily.so/thetoiletpapers/posts/0550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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