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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 Sep 29. 2019

디테일의 끝에는 서체가 있다

산돌 '권경석'이사님의 강연을 듣다

‘산돌’은 석금호 의장을 필두로 30여 년간 오롯이 한글 서체 개발에 몰두해온 국내 최초의 폰트 회사이다. 나아가 현대카드, 배달의 민족과 같이 대중에게도 익숙한 브랜드 서체를 개발하여 브랜딩 요소로서의 서체 디자인의 중요성을 보여준 회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5월, 디자이너인 내가 매일 접하는 브랜드이자 관심있게 지켜보는 기업인 '산돌'의 ‘권경석’ 이사님의 강연에 참석하게 되었다.


강연의 첫 번째 주제는 ‘왜 요즘 브랜드는 산세리프를 선호할까?’라는 질문이었다. 산세리프체란 글자 획의 끝이 돌출되지 않고 반듯하게 끝나는 서체로, 그 반대로는 세리프체가 있다. 한글로 따지면 산세리프체는 고딕, 세리프체는 명조체이다. 나 역시 디자인을 처음 공부했던 학생 시절부터 누군가 시킨 것도, 산세리프체가 더 좋다고 배운 것도 아니었으나, 나를 비롯한 내 동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산세리프체를 주로 사용해왔다. 아마도 주류의 익숙함과, 반듯함이 주는 무난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고딕체가 가독성이 높다고 배워온 탓도 있다.


그러나 최정호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명조체는 뛰어난 가독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책과 같은 아날로그 환경에서 명조체가 주를 이루는 이유이다. 반면 디지털 환경에서는 노토 산스와 같은 고딕체가 주를 이룬다. 디지털 화소가 명조체의 세밀함을 다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디지털 환경에서는 명조체가 오히려 눈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고딕체가 유행하게 된 이유이다.

원도 설계 중인 최정호 선생님 (출처: design db)


명조는 디지털이 미처 따라잡지 못한 아날로그의 뛰어남을 반증하는 서체이다. ‘권경석’ 이사는 명조체가 내비게이션 같다고 설명하였다. 획의 시작과 끝, 꺾임을 알려주는 많은 인지 요소와 친절함을 갖춘 서체라고 하였다. 명조체는 변별력이 뛰어나 여러 글자를 한 곳에 합쳐 놓아도 식별이 가능하다. 뿐 만 아니라 소실점을 가지고 있는 명조체는 획의 사선 구조가 주는 입체감과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명조는 사람의 손글씨를 재현한 서체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비교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인간다운 것’을 좋아하나 보다. 일본 서체의 대가인 토리 노우미는 자신이 배워온 모든 기술을 집약해 히라기노 명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히라기노 명조보다 어딘가 살짝 어설픈 유우츠키 명조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 이유는 히라기노는 기술적으로 세련되고 완벽하지만 유우츠키가 가진 인간미가 없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히라기노 서체의 완벽함이 사람들에게 안정감이나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출처: 산돌


현재는 패션계를 비롯하여 많은 분야에서 여전히 고딕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에서 역시 명조의 세밀함을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 그에 따라 머지않아 명조의 따스함과 편안함이 다시 각광받게 될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것은 ‘배달의 민족’ 서체 개발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산돌이 배달의 민족 서체를 개발할 당시, B급 감성, 어눌함, 재치 있는 이라는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처음 서체를 디자인해보는 사람에게 맡겼다고 한다. 배민다움이라는 기업 정체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문득 얼마 전에 들은 브랜딩 에이전시 디렉터의 고민이 떠올랐다. 대중적이고 친근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임에도, 무조건 멋지고 세련되게 디자인해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요청 때문에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는 것 같다는 고충이었다. 배달의 민족이 불완전한 아트웍과 B급 문화를 과감히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이 설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확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구성하는 모든 소비자와의 접점을 일관되게 구성하는 것이 좋은 브랜딩의 핵심일 것이다.



산돌 강연을 통해 좋은 서체란 무엇이고, 서체 디자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득 유지원 디자이너의 <글자풍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수동적인 가죽 장정 대신 능동적인 독서를’. 책이 부르주아와 귀족의 비싼 서재를 그 호사스러운 가죽 장정으로 장식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모든 독자의 손에서 능동적으로 펼쳐지도록 함으로써 편안한 독서를 제공하는 역할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것이 바로 ‘타이포그래피의 근대정신’이다.


그리고 현재, 서체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근대정신을 넘어 브랜드의 인상을 결정하는 브랜딩 요소로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에는 ‘헬베티카’, 런던에는 ‘길 산스’와 ‘에드워드 존스턴’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산돌의 ‘서울서체’가 있다. 서울의 표지판과 지하철 안내문구 등의 서체가 ‘서울서체’로 바뀌면서 이 아기자기한 서체가 만들어내는 서울의 인상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병욱 카피라이터는 그의 책 <생각의 기쁨>에서 ‘서체를 고르는 것은 목소리를 고르는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서울서체’ 덕분에 서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고 귀엽게 들리는 것 같다.

출처: Typhography seoul


한글 같은 조합형 문자의 서체를 개발하려면 최소 3,500자에서 최대 18,300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서체 디자이너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솟는 이유다. 서체는 말 그대로 디자인의 기본적 요소이기 때문에 서체 하나로 디자인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좋은 한글 서체를 개발해주는 산돌 같은 서체 디자인 회사는 국내 디자인의 근간이 되는 회사일 것이다. 국내에 이런 회사가 있다는 것이 디자이너로서 고맙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는 단 한 번도 유심히 들여다본 적 없을 무수한 디테일의 세계에서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모든 서체 디자이너들에게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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