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 키우기, +D 91
남편의 이른 출근 배웅을 하고 화장실에 앉아 생각했다. '남편 출근 배웅이 근 한 달 만인가...' 나는 이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건가.
어제는 남편과 아기와 함께 공원 산책도 했다. 우주복 비슷한 외출복을 입히긴 했는데 밤에 아가 기침이 잦아졌다. 어제 목욕도 너무 여유롭게 시켰던 건 아닌가, 하고 남편이 말했다. 100일도 안된 아가가 감기 걸리게 하다니 부모인 나는 너무 미안하다.
이제 100일이 열흘 남았다. 100일 동안은 죽은 것처럼 살라고 했지...! 출산 후 초반, 아기와의 허니문 기간보다도 산욕기를 지난 중반 이후부터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모유수유를 고집하느라 더욱 힘들었다. 초반부터 모유수유가 원활하지만은 않았던 터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이 얘기는 따로 또 해보려고 한다. 아직도 아가 몸무게가 5kg 정도밖에 안 되어서 속상하지만, 생각을 해본다. 이제 나의 아기는 목 가누고 배밀이를 하고, 뒤지고, 기고, 앉고, 서고, 뛰고, 말하면서 수많은 음식들을 먹기 시작할 테고 더욱 쑥쑥 클 터이니...... 길게 길게 보려고 한다. 그저 모유를 100일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
이런 육아의 고난, 고통, 헌신이 모든 부모들에게(일부 제외) 있었으리라는 걸 깨닫게 되면 내가 그간 심리상담과 교육, 표현예술치료에서 다루었던 거대한 듯 보이는 부모이슈가 얼마나 하찮아지는지 느끼게 된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정서적인 지지를 주지 않았어요!'
'엄마는 날 위로해주지 않았어요!'
'엄마는 날 더 서포트해주지 못했어요!'
또 그와 반대 방향에서도, 나 역시도 자식으로서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나는 부모 속을 썩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사춘기도 딱히 없었고(그것이 더 좋지 않은 것이었다는 건, 나중에 심리학 공부를 하며 알게 되었지만), 사교육 없이도 중학교 때는 전교 1등을 하곤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말썽 없이. 진로도 혼자 찾아갔다. 취업도, 결혼도 모두 부모 지원 없이 해냈다. 그래서, 나중에 덜 자란 아이어른으로 맘고생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하니, 서로가 할 만큼 한 것이다, 우린. 그리고 부모자식 간의 끈끈한 인연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각자가 고유한 세상. 독립된 세계의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와 부모님은.
어쩌면 엄마가 한 가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당신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엄마의 유품이었던 일기장에는 결혼식 직전, 뒤늦은 사춘기로 엄마에게 소리소리를 질렀던 나에 대한 내용이 쓰여있었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내 딸이 나에게 소리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그러한 희생은 우리 관계의 독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들(예를 들면 귤을 까먹는 일조차도 편하게 해 주려고 귤을 까준다던가)을 모두 해주려 했고, 그러한 태도를 보고 자란 나는 엄마에게 더 큰걸 바라고 그걸 주지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면서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못한 존재'로서 미워했다.
"부모 자식 간에 주고받아야 할 것들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정답은 없다. 하지만 주고 싶은 건 있다. 갓난아기인 나의 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토록 조절 능력이 부재하여 모든 걸 옆에서 조절해줘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식에게 거의 모든 부모는 삶의 초기에 거의 모든 것을 해주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도 아이에게 해주어야 할 과업은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기왕이면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 못해줘서 속상한 때도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주고 싶은 것의 대원칙을 생각해놓으려 한다.
1.
내가 엄마에게 바랐지만 받지 못했던 것. 나는 그것을 주고 싶다. 그것은 엄마의 행복한 모습을 많이 많이 보여주는 것. 엄마가 삶을 즐기고 만끽하며 감사해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 바로 옆에서 보여주고 싶다. 사실 아이 키우는 데 있어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을 힘겨워하지 않는, 결핍을 기회로 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삶은 기꺼이 살아볼 만한 것임을. 수없이 부딪히고 수많은 결핍이 있다 해도 그것 역시 삶이고, 농도 깊은 생명 활동임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기도 삶을 두려워 않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맘껏 펼치는, 그리고 그로 인해 그 환경마저 바꾸어가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2.
자신의 정서를 무시하지 않고 잘 다룰 수 있는 존재로 클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때로 내 욕구를 참아야 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내 욕구를 잘 알고 표현할 때도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 그것은 나쁜 게 아니고 건강한 것임을, 그러므로 건강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함께 연습하고 싶다. 이왕이면 예술의 형태로 그걸 가르칠 수 있었으면 한다. 말하기, 글쓰기, 몸 움직이기-춤추기, 운동하기-, 그림을 그리기, 노래하기, 악기를 연주하기... 세상의 모든 고통은 정서에서 온다. 생각이 정서를 만들어내고, 그 정서가 나를 기쁘게도 하고 힘들게도 한다. 나는 정서를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감정을 다루려고 하느라 긴 시간을 소비했었다. 그 결과 나의 정서 세계는 열등한 세계가 되어버렸고, 이성과 논리로 억누르는 어색한 분노를 주변 사람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내 아기는 자신의 정서를 무시하지 않고 잘 다루고 그것에서 배움을 얻는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3.
아기를 키우면서, 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조절능력"을 얻어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늙은 성인인 나는 아직도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없이 연습하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용기를 내고, 실행해 본다(특히 남편과의 관계에서). 아기는 체온조절, 감정조절, 식욕조절 등 모든 면에서 조절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아기가 발달하면서 조금씩 조절능력을 얻어가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전보다 덜 자주 울고, 전보다 배고픔을 더 참을 수 있게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아~ 인간이 된다는 건 평생에 걸쳐 자기 자신을 조절하는 능력을 발달시켜 가는 것이구나를 깨닫는다. 내가 오랫동안 못했던 그런 "조절"의 능력을 아이에게 잘 가르치고 싶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당장 가질 수 없어도 울음을 참고 기다리는 법. 내 욕구가 좌절되어 화가 나도 상대에게 바로 말하지 않고 현명하게 전달하는 법, 이런 것들을 잘 가르쳐주고 싶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제 아기를 깨우러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