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a Westover의 [Educated]를 읽고
"참교육"이 뭐길래 요즘 아이들이 그렇게 누군가를 "참교육" 시키고 싶어 할까? 어느새 이런 신조어를 들으면 깔깔대고 웃기보다는 한 번쯤 고민을 해보는 나이가 된 것이 새삼 착잡하다만... 그래도 고민해봤다. 먼저 참교육의 정의부터 알아보자.
참교육은
참 (진리;true) + 교육 (가르치고 배우는 것; education)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 이랬던가? 참교육은 [긍정+긍정]의 구조로 형성된 단어지만 많은 경우 진리에 가깝지도 않거니와 교육적이지도 않다. 참교육이란 단어가 원래 "True Education (진정한 교육)"의 의미였다면, 지금은 "Teaching a lesson (한 수 가르쳐주다)" 정도의 의미로 격하된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예를 들어보자.
2018년 현재, "참교육"은 "혼쭐을 내준다" 정도의 뜻을 내포한 신조어다.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한 누군가를 처벌 (도덕적 정당성과는 별개의 처벌)할 때 자주 사용된다.
(1) 십수 년 전만 해도 학교의 문제아를 어르고 달래서 대학에 보내는 것을 참교육이라 했다. 반면 지금은 선생님이 일진 학생을 10분 간 흠뻑 두들겨 팼을 때 그것을 "참교육"이라 말한다.
(2) "철수가 민수를 "참교육"했다"라고 한다면 철수가 민수에게 교훈을 주어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는 말이 아니다. 아마 본인이 게임을 아주 잘한다며 우쭐대던 민수를 상대로 철수가 대승을 했다던가, 아니면 거들먹거리던 민수를 철수가 한 대 패준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SNS에 올려 "참교육 현장"을 보여주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러한 단어 사용이 나쁜 건 절대 아니다. 특정 단어가 그 고유의 뜻만을 유지해야 할 이유도 없고 신조어가 탄생하는 것이 나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를 내포하게 된 데에는 분명 또 이유가 있겠지.
얼마 전,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Top 10의 위치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Tara Westover의 "Educated"를 읽으며 나는 문득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몰몬교와 음모설에 심취한 나머지 일루미나티(illuminati)와 연방정부를 피해 아이다호(Idaho) 주 산속에 살아가는 Tara Westover의 가족은 학교도 병원도 가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피해망상과 자아분열에 시달린 아버지와 이런 상황에 순응해버린 어머니로부터 고통받고 세뇌당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오빠로부터 당한 폭력도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연히 받게 된 교육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을 아주 조심스레, 그리고 자세하게 본인의 책에 담았다.
이 시골 소녀는 우연히 둘째 오빠의 추천으로 미국 대입시험 ACT를 공부하게 되고 Brigham Young 대학으로 진학해 결국 영국 Cambridge 대학의 역사학 박사 과정까지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뒤늦게 세상의 역사, 정치,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게 되고 자신의 가족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본인이 이런 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세뇌받아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본인이 받아온 학대와 세뇌를 이겨내는 이 모든 과정을 한 마디로 edcuated라고 정의한다.
자신의 삶을 educated라는 한 단어로 정의하는 저자, 그녀가 어쩌면 진정한 참교육이 자취를 감춘 우리 사회에 큰 함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에서 저자는 진정한 몰몬교 여성은 집에서 남편을 섬기고 문란한 옷을 입지 않으며 아이를 키우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반복적인 설교를 통해 지속적인 세뇌를 당한다. 그리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던 첫째 오빠도 지속적으로 저자를 두들겨 패고 살해 협박을 하는 등 신체적 폭력을 가한다. 그들의 눈에는 세상으로 나가 학교를 다니려 하는 저자가 문란하고 세상적이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무례하고 음탕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폭력은 어긋난 여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요즘 이야기하는 "참교육"의 일환으로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는 자신을 더욱 미워하며 스스로를 더 깊은 불행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어긋난 "참교육"의 압제로부터 스스로를 자유케 하려는 저자의 발버둥 또한 교육을 통해 이뤄진다. 17세까지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역사와 정치, 철학 그리고 "상식"은 그녀에게 파도처럼 밀려와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주고 자신의 과거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제공한다. "지식이 너를 자유케 한다"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저자는 자신을 옥죄는 수많은 비합리적인 기준과 사상이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이해해 나간다.
"참교육"을 진정한 "참"교육으로 이겨낸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국을 생각했다. 점점 "참교육"의 현장은 늘어가고 "참"교육의 현장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물론 나는 한국 교육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한국 교육을 정확히 평가하거나 세밀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믿음의 붕괴, 아니, 더 나아가 "지식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라는 말에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는 강력하고 잔혹한 "현실의 압제"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알기 위한" 지식은 천대받고 "하기 위한" 지식만이 추앙받는 시대. 새로운 관점과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지식이 아닌 대입을 위한, 취직을 위한, 그리고 성공을 위한 정답과 기준을 제시하는 지식만이 가치 있다 여겨지는 시대. 이 시대가 숭상하는 지식은 저자의 아버지 Gene의 왜곡된 몰몬 교리나 음모론과 구조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어려운 문제다. 교육은 너무나도 많은 이익의 충돌이 일어나는 영역이다. 그러나 적어도 앎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도구로서의 앎 (knowledge as means)을 넘어 목적으로서의 앎(knowledge as ends)을 추구하면 어떨까 싶다. 결국, 플라톤의 말대로, 안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덕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