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건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전 직장 대표님이자 편집장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법인 감사 사임서를 써달라고요. 내가 그런 걸 했었나 갸웃하던 찰나 전 회사가 모회사에서 독립되며 부랴부랴 인감도장을 만들어 새 법인 감사직으로 날인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아, 회사가 정리되는구나.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인생의 한 챕터가 종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음 한켠의 무언가가 해소되는 기분에 끝을 보지 못한 미안함이 묻어나왔습니다.
항상 도망치듯 직장을 옮기다 보니 이전 생활에 대한 깔끔한 마감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정작 에디터로서 매월, 매주, 매일 마감하는 삶을 살았는데도 말이죠.
어떤 일이건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끝내야 할 걸 끝내지 못하니 유통기한 지난 음식이 잔득 쌓인 냉장고 같은 삶이랄까요. 무언가가 해소되는 느낌은 이를 의식한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가 시작한 일에 대해 마무리한다는 책임이 두려웠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로서의 회피처럼요.
일이건 인간관계건, 자의건 타의건, 죽이되건 밥이되건 직접 마침표를 찍고 챕터를 마감해야 하는데 끝을 마주하는 두려움에 도망을 택한 게 아닐는지.
돌아보면 인간관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미 정리해야 할 관계이지만, 끝이 두려워 언젠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속이는 것이죠.
실제로 이미 관계가 정리된 상황에서 간신히 그 분열을 이어 붙인 경험이 없지 않은데요, 그때마다 삶의 한 챕터를 공유했던 사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해왔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관계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을지도요.
회피 본능에 더해 일종의 정신 승리가 쌓이면서 마감을 모르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습니다. 쳐 물린 주식 계좌를 보고 언젠가 다시 올라오겠지 믿는 바보처럼요. 실제 내 상황이라 웃음이 나진 않네요.
어느덧 2021년이란 챕터 또한 종료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람이 차니 끝이 두려워 열어둔 지난 세월의 문들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미 정리했어야 할 인생의 챕터를 종료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