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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파이시너드클럽 Apr 21. 2022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가끔은 그냥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봄입니다. 남들이야 꽃놀이다 뭐다 비로소 새로운 해가 탄생하는 기쁨을 만끽하겠지만 오히려 내게 봄은 소멸과 맞닿아 있습니다.


2019년 4월 23일. 가장 증오했던 사내가 소멸했습니다. 이미 끝을 알고 있던 데다 마음의 준비도 했던지라 크게 동요치는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증오했다고 표현했을까요.


구로에서 구리, 서울을 가로질러 가는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도 부끄러움은 애초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지인들에게 그의 부고를 알렸을 정도니까요. 태연하게 전화를 마쳤을 때 기사님의 무거운 침묵만이 그날의 온도를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 나는 그토록 그를 증오했을까. 


어릴 적 내게 그는 말 그대로 못 하는 게 없는 존재였습니다. 진부하지만 영웅이었달까요. 뭔가 원할 때 항상 그가 있었으니까요.


그를 따라 야구장을 갔을 때 야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가구점에서 근무했던 솜씨를 살려 수제 야구방망이를 선물해준 그였습니다.


트럭에서 신발을 팔던 그 덕에 어렸을 때 내 신발은 항상 그 시절 가장 유행하는 캐릭터 운동화였죠. 한 번은 스트리트파이터 운동화를 신게 됐는데요, 하루 이틀 지나니 동네는 어느새 같은 운동화를 신은 아이들로 가득 찼더라고요. 모두 그의 손을 탄 탓이겠죠. 그 성격에 돈은 제대로 받았을지.


어릴 때만 해도 할머니를 비롯해 온 가족들이 모여 계곡이건 휴양지건 놀러 갔는데요, 항상 가장 앞에서 운전하는 건 그였습니다. 정말 구석구석 모르는 길이 없었거든요. 그때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몰랐습니다. 


근데 지금 보세요. 내비 없이 어디 운전이 가능한가요. 오죽하면 그의 별명은 길을 잘 안다 해서 '길동이'였겠어요. 말없이 운전만 하던 그를 '서길동'이라 놀리던 고모들의 웃음소리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뿐일까요. 새로 산 봉고차에 누나와 나를 싣고 시멘트 찬 드럼통까지 박아가며 달려갔던 양식 돈가스집의 추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엄마가 후라이팬에 튀겨주던 냉동 돈가스만이 세상의 전분 줄 알았던 우리니까요. 


이른 시간 나가 자정에 가까워 돌아오던 고단한 하루에서도 이미 잠든 걸 알면서 누나와 내가 사랑하던 햄버거 세트를 사오셨던 날들도 기억합니다. 


위너스버거. 다음 날 아침, 식을 대로 식은 햄버거에 눅눅해질대로 눅눅해져 가지 같은 식감으로 변한 감자튀김, 거기에 완전히 녹아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밀크쉐이크까지. 


어떻게 그 맛을 잊을까요. 어떻게 그날들을 잊을까요. 증오에 앞서 나는 이렇게 당신을 좋아했다고요.


당신이 떠나기 전 좋은 기억 몇 가지를 간신히 붙잡고 걷잡을 수 없이 기억을 잃어가던 것처럼 좋은 추억을 악착같이 붙잡고 그렇지 못한 기억을 잃어낼 수 있을까요.


증오로 가득하던 마음은 이제 당신의 부재로 인한 부담과 책임감으로 채워내고 있습니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덜어낸 무게가 너무 무겁습니다. 어떻게 한마디 불평 없이 이 큼과 무거움을 채워내셨나요. 


가끔은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워 그냥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아버지의 품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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