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22년 7월부터 23년 12월까지 '스쿨잼'에 연재했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시간이 지났기에 수정된 부분도 있음)
스쿨잼 링크는 글 아래쪽에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교육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경영의 실제’라는 피터 드러커의 책엔 이런 내용이 있답니다.
‘사업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타당한 정의만 존재한다. 즉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피터 드러커, 2006)
처음 위의 내용을 접했을 때 스스로에게 질문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를 말이지요. 그런데 그 대답이 쉽지 않았어요. 교육이란 짧은 두 단어가 가진 엄청난 무게감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시간은 흘러 교사로 살아온 지 20년이 훌쩍 넘었어요. 지금은 교육이 무엇이냐는 것에 답을 할 수 있냐고요? 네, 지금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이지요. 처음 이 생각을 한 것은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통해서였어요. ‘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말로 유명한 정치 철학자인 아렌트의 이야기 속에 정치 철학을 설명하며 둥근 사각형 그리기와 같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아렌트에게 정치 철학이란 말은 마치 “둥근 사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으로 간주된다.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그 자체로서 다루어야 하는 정치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2013)
철학과 정치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졌기에 두 가지를 묶어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아렌트의 말이 교육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둥근 사각형을 교육을 통해 그릴 수 있을까요?
교사로 살아가기 시작한 20여 년 전, 그 당시 저에게 교육한다는 것은 그리 복잡한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그저 저에게 주어진 교과서를 들고 내용을 분석한 후 아이들에게 잘 전달(?)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엔 어떻게 하면 교과서 내용을 아이들에게 쉽게 알려줄지만을 고민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것도 쉽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만. 그래서 수업 한 차시 한 차시가 무척 중요했어요. 그리고 필사적으로 매달렸어요. 수업에서 ‘실패’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날은 수업이 성공적이라 생각되어서 기분이 좋았고, 그렇지 못한 날엔 우울했답니다. 초임기 교사로 살아가며 성공과 실패로 수업을 바라보던 제가 지금은 수업을 다르게 보고 있답니다. 성공과 실패가 아닌 ‘도전’의 관점으로 말이지요.
수업은 실패와 성공의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이 도전의 순간인 것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을 경력 10년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어요. 성공과 실패가 아닌 도전의 관점으로 수업을 바라볼 때 교사는 진정 전문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생각의 전환이라 생각합니다.
교육에서 보이는 현상 중 고학년으로 갈수록 아이들의 수업 참여 모습은 달라져요. 1학년이나 2학년 담임을 경험해 본 교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수업시간에 적극적인지 알고 있지요. 하지만 고학년의 경우엔 어떤가요? 수업시간 적극적인 참여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요.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엔 아이들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그동안 경험한 자신의 발표가, 자신의 참여가 성공적이었는지 실패했는 질 말이지요. 누구도 실패의 경험을 좋아하지 않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교사의 수업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생각해요. 아이들에게도 수업시간 자체가 도전의 과정처럼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물론, 교사에게도 이런 관점의 변화는 중요해요. 수업에서 성공하기보단 실패했다 생각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교사는 무기력해지기 때문이죠. 교사의 무기력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도 한답니다.
2015년 새로운 학교로 옮기고 6학년을 맡았어요. 새로운 학교, 새롭게 만나는 아이들이 낯설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어려움은 아이들의 반응이었죠. 학년 초 수업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아이들에게 무기력이 아주 깊이 퍼져있음을요. 깊은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하지만 교사였기에 그 상황에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지요. 도전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아이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 교육이 가진 모습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2022 개정 교육과정이 현재 막바지 정비 중이라고 합니다. 22년 하반기에 총론이 고시되고 24년부터 초등학교 1, 2학년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교육과정이 계속해서 개정되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하게 시대에 따른 교육방향 설정에 있을 것이지요. 그동안 이렇게 변화되어 온 교육과정은 나름의 일정한 방향성이 있답니다.
새롭게 개정되어 왔던 교육과정들은 ‘통합’과 ‘주제’ 그리고 ‘역량’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결국 교육이라는 것이 학교에서 실현되는 모습은 개별 교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 세상이 단순하지 않듯이 교육의 방향도 점점 더 융합적인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길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학교의 모습도 이렇게 달라져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것일까요?
2020년,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3월 개학이 미뤄지고 언제 개학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지요. 모두가 걱정스러운 상태였고, 학교 교육도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지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학교를 가지 못한다고 하니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그때 교육부에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교육방송을 통해 수업을 진행해 주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수업의 모습이 예전 부모님 세대가 학교 다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어요. 수업이 예전 그대로인 모습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초등학교에서의 수업 모습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 모습이 거의 똑같았다는 것이었어요. 초등학교에서의 수업 모습이 고등학생들과 같을까요? 물론 방송으로 진행되는 수업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무척 아쉬웠고 안타까웠어요. 특히 수업의 목적이 각 차시별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이해했는지를 물어보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더 안타까웠답니다.
앞에서 둥근 사각형을 그리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한다고 밝혔어요. 교육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성취만이 목적이 될 순 없다 생각해요. 교육을 통한 성장도 중요할 테니까요. 꼭 둥근 사각형을 추구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전 그래서 이 두 가지의 균형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답니다.
예전에 제가 받았던 교육은 성취를 위한 교육이 앞선 교육이었던 것 같아요. 성취를 앞세우다 보면 정답 찾기에 몰두하게 되어요. 결국 학생 개인의 생각보단 정답을 찾기 위해 상대방 특히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예전 중입 시험이 존재할 때의 초등학생들은 지금의 초등학생들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았답니다.
성취를 위한 교육, 정답을 찾는 교육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한쪽으로 치우쳐진 교육은 분명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교육은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교육과 동시에 성장을 위한 수업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생각해요. 우리가 새롭게 접하게 되는 교육과정의 개정 방향도 이런 생각들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요즘 세상은 모든 것이 디지털로 연결되어 있어요. 모든 기기들은 디지털 세상과의 접속 도구가 되었고 우리의 삶도 디지털 세상 속에 더 많이 노출되고 있지요. 특히 최근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디지털 세상에 친근한 세대인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래 교육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이 주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코로나로 우리 모두가 경험한 온라인 수업의 형태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최근 교육계에서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디지털 세상 속에서 첨단 기기들을 활용한 교육은 신유물론자인 캐런 버라드(Karen Barad, 1956∼)의 말처럼 행위 주체성이 인간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버라드는 행위성 자체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비인간의 경우에도 똑같은 행위성이 주어진다 이야기해요.)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디지털 세상이 가진 성질에 대해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요. 디지털 시대의 특징 중 중요한 한 가지는 “효율성”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효율적인 것과 효과적인 것은 같은 것일까요? 만약 같지 않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교육은 효율적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효과적이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디지털과 대비되는 아날로그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이 부분을 생각했답니다. 요즘 우리가 듣는 음악은 대부분은 디지털로 된 음악이지요. 예전엔 레코드 판 혹은 CD를 구입해서 많이 들었다면 요즘은 거의 다 온라인 뮤직 앱(멜론, 벅스, 애플뮤직 등)을 통해 음악을 듣지요. 예전에 우리가 자주 음악을 듣던 방식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었고 그때 우리가 들었던 음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아날로그를 지금도 좋아하시는 분들은 레코드 판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둘러보시고 책장 가득히 모으시지요. 음악을 듣지 않아도 그것만 바라보아도 힐링이 된다 말씀하시는 경우를 많이 만났어요. 아날로그가 가진 속성은 그래서 따뜻함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실제로 데이터를 양으로 측정했을 때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디지털은 아날로그완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음악을 전달해 준답니다.
디지털로 전달되는 음악의 모습은 아날로그완 다른 모습이지요? 그 이유는 디지털에선 불필요해 보이는 데이터는 제외하고 필요하다 생각되는 정보만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음악을 예로 들면 우리 인간이 듣지 못하는 음(주파수)은 제외하는 것이죠. 불필요한 정보를 제외하는 극히 효율적인 모습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아날로그로 듣던 음악과는 다른 느낌이 든답니다. 과학적으론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가 있기에 아날로그나 디지털이나 큰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은 과학만으로 세상을 만나고 해석하진 않는 존재이니까요. 느낌이나 기분과 같은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잖아요.
정리해 보면 디지털은 효율성을 추구하고 아날로그는 효율적이진 않지만 효과적이라고 할까요? 전 비록 덜 효율적이더라도 (불필요해 보이는 정보들이 포함된 아날로그적 음악) 아날로그적 교육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해요. 물론 이 경우에도 효율성과 효과성은 동시에 중요하게 작용해야 하겠지만요. 하지만 무엇을 앞세우느냐에 따라 우리의 교육은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세상이 변화되었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인정하지요. 세상이 변화되는 속도 또한 무척 빠름을 인정할 수 밖엔 없어요. 매일매일이 새로운 세상인 요즘, 우리에게 예전관 다른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생각해요. 이제 정보 자체는 누구에게 독점적일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해요.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누구나 쉽게 알고자 하는 것을 검색하고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물론 학교에선 누구나 알아두면 좋을 정보들을 함께 알아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얼마나 잘 기억하는지, 이해했는지 시험이라는 방식을 통해 확인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의 성과를 무엇인가를 얼마나 성취했는가로만 바라보는 것은 어딘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요. 지금과 같은 시대라면 오히려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그 정보를 활용하는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러려면 결국 그것의 핵심에 그 사람의 바른 생각과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20년이 넘는 학교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은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것이었어요. 성취를 통해 누군 앞서있고 누군 뒤처져있다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함께하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해요. 수업은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효과적이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질문과 답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