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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시니 Dec 20. 2020

# 8. 빌런 주식회사

사칭에 유의하세요.

빌런 :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악역을 뜻하는 단어로 주변 사람들이나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특이한 행동으로 관심을 끄는 사람을 뜻함.


영화는 빌런이 끌고 나간다. 빌런의 악행으로 시작되고, 빌런의 소멸로 끝이 난다. 이런 빌런은 생활 곳곳에도 숨어있다. 내 인생에 숨어있는 빌런 때문에 하루 시작을 망치기도 하고, 잘 끌고 나가던 프로젝트를 빼앗기거나 망쳐버리게 될 때도 있다. 신기하게도 이런 빌런들은 회사에 더 많이, 다양한 유형으로 구석구석 숨어있다.


내가 경험한 빌런 유형은 스파이형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교육을 진행하며 사진을 남겨야 했는데, 진행과 동시에 여러 사진을 남기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스파이형 빌런이 내가 진행하고 있는 교육 공간에 들어와 사진도 찍어주고 안전관리를 해주었다. 교육이 진행되면 신경 쓸 일이 많고, 그것을 스파이형 빌런도 알고 있기에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찍은 사진들은 임원에게 보고되었고, 중간중간 동영상도 촬영되어 내 교육은 내가 모르는 새에 평가를 받고 있었다. 돌아보니 이런 식으로 사람 좋은 얼굴로 교육 현장에 들어와 우리 팀 업무를 보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들이 꽤 있었다.


스파이형 빌런의 행동을 알게 되고 그 사람에게 직접 동의 없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고한 적이 있는지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 사람의 호의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다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내가 입사한 지 3개월 즈음되었을 때였다. 지방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출장을 가 있었다. 미흡한 부분이 많은 행사였기 때문에 운영진도 걱정이 많았던 행사였다. 행사 도중 임원에게 전화가 왔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행사장 곳곳과 행사 참여자들 사진과 동영상을 5개 이상 찍어서 메신저로 공유해라.' 아무래도 동영상 공유는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진 몇 장을 공유했다. 그러자 다시 전화가 왔다. '지금 이건 고자질하는 거 아니고, 임원로서 내가 상황판단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동영상을 찍어서 공유해라.' 두 번째 전화 내용은 날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난 두 번째 전화에서 확신했다. 임원 기준에 맞지 않는 동영상 내용을 공유할 시 서울에 돌아가 꽤 많은 사람이 곤란해질 것을.


나도 스파이형 빌런이었다. 내 이전 회사는 스파이형 빌런 제조사였다. 회사 내 모든 인원이 몇 가지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다가 사업이 확장되고 사원들이 맡아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이 늘면서 임원들은 불안해졌던 것 같다. 작은 사업체 운영 시엔 필요하지 않았던 덕목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덕목을 쌓을 틈 없이 입찰 규모는 커져갔고, 임원이 선택한 방법은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 비공식적인 경로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김용회 작가님의 웹툰 중 [도깨비언덕에 왜 왔니?]라는 작품이 있다. 인상 깊게 본 작품인데 가장에 기억에 남는 장면은 동물들의 전쟁 장면이다. 얽혀있는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동물들 중 내가 생각한 가장 강력한 동물은 바로 모기였다. 모기는 자는 적에게 침투하여 귓가에 윙윙 거린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대를 세뇌하는 과정이다. 어떤 집단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이간질이다. 서로를 미워하고 의심하도록 하면 그 집단은 알아서 망가지고 결국 서로를 미워하며 갈라지게 되어있다. 임원은 회사를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모두를 스파이형 빌런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서 우린 서운하고, 의심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퇴사할 이유는 하루에도 수백수천 가지가 생긴다. 그중 스트레스 순위 1위는 단연 동료와의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혹, 지금 옆에 누군가가 밉다면 누가 나로 하여금 이 사람을 미워하게 만드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이런 갈등을 오히려 조장하여 소속감을 주고, 그 불안감을 이용하여 상황을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상사이고, 운영을 담당하는 임원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쳐나오자.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도리어 나를 갉아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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