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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시니 Dec 27. 2020

# 9. 신이 내린 직장의 필요조건

내성발톱 같은 내 사수

최근 SNS에서 '체질 금수저 테스트'라는 것을 봤다. 수족냉증, 아토피, 내성발톱 등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거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수준의 질환이 아니라 소소하게 나를 괴롭히는 질환을 나열하고 이 중 몇 개 질환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열하여 타고난 체질이 얼마나 건강한가를 이야기하는 테스트였다. 이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몸을 갖는 것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직장을 테스트하기 위해선 어떤 항목을 확인해야 할까?


입사를 하고 3주쯤 되었을 때(입사 직후 3주 차, 수습기간) 지방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운영진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행사 진행자는 임원 2명과 사원은 나,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3명으로 구성되었다. 행사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1박 2일 교육 캠프였다. 보호자 없이 진행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참가자의 안전, 생활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 일정이었는데, 내게 전달된 내용은 캠프 주제, 전체 일정표, 행사 장소로 가져온 짐 목록뿐이었다. 하지만 전체 일정표는 상황에 따라 바뀌었고 캠프 주제 범위가 넓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파트타이머에게 전달된 내용도 내가 전달받은 내용과 같았다. 표면상 정규직 직원이었던 내게 파트타이머들은 여러 질문을 했지만 나는 (적당히 아는 척) + (사실 확인을 해보겠다는 말) = (죄송합니다. 저도 몰라요.) 태도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행사 장소는 숙소와 본 행사가 진행되는 강당, 식당 각 건물 사이 거리가 꽤 되는 곳이었다. 즉, 안전 관리를 위해서는 참여자들의 동선을 미리 예측하고 통제를 해야 했는데 그 공간이 3곳이나 되었다. 내가 왜 바쁜지도 모른 채 바쁘게 장내를 움직이며 행사를 진행했다. 파트타이머는 일정이 끝나고 쉬고 있었고, 임원 2명이 행사가 진행되었던 강당 정리를 마무리하는 동안 나는 숙소에서 참여자들의 생활, 안전 관리를 담당하도록 지시받았다. 행사가 진행되었던 계절은 겨울이었는데, 하루 종일 캠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긴장이 풀어진 아이들 중엔 종종 미열이 발생하여 두통을 호소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 캠프에서도 몇 명의 아이들이 두통을 호소했고, 동시에 화장실 문을 안 쪽에서 잠가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호소했고, 방 안에서 놀다가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당황했지만 먼저 두통을 호소하는 아이에게 처방을 하기 위해 임원에게 전화하였으나 수신이 되지 않아 부재중을 남겼고, 싸움이 발생한 방으로 가 감정이 상한 아이들을 분리하고, 관리실이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드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 과정을 마치고 감정이 상한 아이들의 문제를 중재하고 있던 중 임원에게 전화가 왔고 두통을 호소하는 참여자에 대해 보고했다. 


사실 이 날의 일들이 시간의 순서대로, 논리적으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일정이 완벽하게 숙지가 되어있고, 발생할 수 있는 이슈에 대해 짐작을 하고 있었다면 그 틀 안에서 의사 결정을 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을 가지고 피드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정은 계속 변동되었고 고려해야 하는 주의사항에 대해서도 전달받은 바가 없기 때문에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상황을 임원에게 전화로 보고하고 결정을 지시받아 수행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쁘고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배운 것이 없는 행사였다.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은 행사 진행 후 캠프 진행자들은 모두 너무 지치기도 했고, 정신없이 끝낸 탓에 피드백할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남은 것이 없는 행사였다.


"로시니 씨 그 행사장 조경이 정말 예쁘게 구성되어 있어요."
"로시니 씨 이번에 공기 좋은 데 가서 기분 전환하고 와요."


이 행사를 가기 전 나의 사수라고 소개받은 상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행사 전반에 대한 정보도 아니었고,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더더욱 아니었을뿐더러, 같이 가게 될 임원의 일처리 방식도 알려주지 않았다. 행사를 진행하며 많은 어려움과 참여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순간들(일처리의 허점)은 누구 한 명의 잘 못이 아니다. 하지만 사수가 사수라는 자리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임원과 사원, 파트타이머가 진행한 행사였지만 사원은 파트타이머와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임원이 많은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었다. 행사 진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이를 근거로 한 업무 분담은 사원인 나에게도 행사의 모든 것을 알고만 있었던 임원에게도 필요했던 일이다.


신이 내린 직장을 선별하는 척도는 연봉, 사내 복지, 기업의 네임밸류, 개인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업무, 업무 환경 등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팀의 분위기와 사수의 역량이다. 경도 증상 질병보다 만성 질환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좋은 사수되는 법'을 검색하면 정말 많은 글과 팁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좋은 사수가 되는 것은 개인의 커리어에도 중요한 일이다. 이 행사 이후에 고민을 많이 했다. 난 어떤 대리, 팀장, 사수가 되고 싶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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