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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시니 Dec 06. 2020

# 4. 탕수육 부어 먹어요? 찍어 먹어요?

탕수육은 원래 소스에 볶아 먹는 거래요.

민초단(민트 초콜릿 맛을 좋아하는 사람), 얼죽아(추운 날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 쪄죽따(더운 날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사람)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을지, 찍어 먹을지’에 대한 논쟁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논쟁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나는 이런 논쟁의 결과로 스터디 카페에서 스터디 존(조용히 공부만 하는 옛날 독서실 같은 분위기 구역)과 프레쉬 존(잔잔한 음악이 나오며 방해되지 않는 수준의 대화와 노트북 사용이 가능한 구역)이 나누어졌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집중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다르고 내가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집중하라고 하는 것은 민트 초콜릿은 냄새도 싫은 사람에게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전에 다니는 회사는 13명 내외의 임직원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인지 사무실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특별히 구성원 대다수가 동의하면 허용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노래였다. 노래를 들으면 업무를 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노래를 듣다가 점차 노래를 스피커로 틀어 다 같이 듣는 분위기가 되었다. 선곡은 그날의 DJ의 몫이었다. 노래는 00년대, 1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부터 애니메이션 OST, 뉴에이지, 밴드 음악 등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선곡으로 재생되었다.


사실 나는 집중을 할 때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 편이다. 더 정확히는 일부러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찾아간다. 노래가 나오고 흥얼거려지면 집중을 흐트러지기 때문에 피하는 편이다. 이런 나에게 노래가 나오는, 심지어 매번 각자의 취향에 맞게 나오는 분위기는 적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업무 집중도를 위해 선곡자가 자리를 피하면 몰래 스피커를 줄이거나, 친한 사람이라면 개인적으로 메신저를 보내 노랫소리를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노래를 트는 권리가 있다면 듣고 싶지 않을 권리도 있다고 생각했고, 나만의 방법으로 의견을 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행동은 사무실 내에서 튀는 행동이었고, 심지어 내게 노래를 들으면서 집중하지 못하는 건 나의 집중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라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 했다. 사무실에서 노래는 일종의 노동요로 직원들의 사기를 증진하고 좋은 선곡을 통해 서로 세대를 공감하는 매개물이었다. 노래를 통해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사기 증진과 공감에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생각을 고치면 해결될 일로 치부되었다.


회사에서 권리는 어디까지 주장할 수 있을까? ‘권리’라고 하는 단어에 연상되는 것에는 연차, 수당 등의 복지만 떠오르는가? 내가 싸워야 했던 내 권리는 업무환경이었다. 회사는 업무를 하는 공간으로 최선의 업무환경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의 업무 환경을 위해 배려할 수 있는 일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있던 회사에서는 배려가 선택사항이었기 때문에 내 권리, 최소한의 업무환경을 위해 주장해야 했다.


노래를 듣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스피커를 통해 듣는 방법, 이어폰을 통해 듣는 방법 등 선택사항이 있으나, 재생된 노래를 피하는 방법은 없다. (업무 중 귀마개를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모두를 위한 환경을 위해 선택사항이 있는 사람이 배려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신입사원이 이런 주장을 하기엔 경직된 조직이었기 때문에 나만의 방법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당시 나의 최선이었다.


오래된 광고 카피라이트 중 “모두가 ‘네’를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용기”라는 문구가 있다. 사무실 내의 노동요로 꽤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나름대로 반박할 논리를 준비했지만 퇴사하기까지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 사무실에 들어왔다 나가는 사람이 많아지며 노동요였던 노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퇴사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모두가 좋다/맞다고 하는 일에 싫다/아니다라고 말할 용기는 내게 없었을 것 같다. 아니, 그 조직 안에선 용기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일을 겪으며 난 말하기 애매한 상황에 대해 배려를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를 부어 먹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소스를 부으면서 탕수육은 원래 소스에 버무려 먹는 것이라는 등의 온갖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 나를 생각하며 상대가 음식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상황을 서로 배려하는 방법을 찾아 소스에 담가 먹는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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