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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세담 Jan 21. 2019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도 괜찮아

나는 우리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좋은 것만 경험하게 해 주고 좋은 것만 가르쳐주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육아에 관한 책을 조금 커서는 교육에 관한 책을 섭렵했고, 주말마다 각종 체험을 찾아다니고 때마다 여행을 다니려고 노력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절대 아이들에게도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음식을 직접 해주고 싶었고, 어릴 때 배워두면 좋을 것들을 다 배우게 해주고 싶었다. 좋은 책을 사서 매일 읽어 주었고, 좋은 수업을 한다는 선생님을 집으로 불러 수업을 받게 했다.


그러다 보니 퇴근 후 단 세 시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2시간에서 1시간이 되고 결국 30분이 되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 집에 와서 아이를 챙기다 보면 체력은 바닥을 치고 체력이 떨어져 피곤해지면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애써 내가 준비했는데 아이가 생각보다 밥을 잘 먹지 않거나 내가 계획한 것을 내 생각대로 아이가 따라와 주지 않으면 짜증이 났다.

엄마~ 엄마~ 나 그냥 엄마랑 안고 있고 싶어~


어느 날 저녁 먹고 학습지 한 장만 풀고 놀자고 아이를 달래는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가 얘기한다. "엄마랑 그냥 안고 있고 싶어.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엄마 냄새 너무 좋아요."


아... 아이는 이토록 엄마가 고팠던 것이다. 좋은 것을 놓치지 않고 해주어 한다는 생각에 정작  내가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책 한 권 더 읽는 것, 학습지 한 장 더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건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중요한 걸 요즘 들어 깜빡 잊은 것 같다.


복직하고 회사에 적응하니 일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 늦어지니 내 마음도 더 바빠졌던 것 같다. 하루 동안 아이가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떤 기분으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조곤조곤하는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데, 정작 집에 와서는 오늘 해야 할 숙제는 다 했는지, 오늘 해야 할 공부는 했는지부터 챙기곤 했다.


엘리베이터에 엄마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예쁜 여자 아이가 같이 탄 적이 있다. "엄마~ 나 이번에 수학시험 100 점 받았다~" 옆에서 보는 나도 절로 웃음이 지어질 정도로 아이는 활짝 웃으며 기쁜 표정으로 엄마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고 녀석, 백점을 받았다니 엄마가 칭찬을 해주겠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그 엄마의 대답은 "그래? 100점이 몇 명이야?"였다. 금세 시무룩해진 아이의 표정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아팠다. 나는 절대 저런 엄마가 되지 말아야지 라고 다시 한번 다짐했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회사선배가 요즘 인기 드라마인 SKY 캐슬을 보면 동생의 친구 얘기가 떠오른다는 얘기를 했다. 엄마가 짠 완벽한 계획대로 공부만 하던 동생의 친구가 수능을 보던 해 물수능이 되어서 결국 평소 모의고사보다 백분율이 낫게 나온 그 친구는 '그것도 점수냐'라는 말을 엄마에게 들었고 고려대 법대에 갔으나 엄마가 이미 등록해 놓은 재수학원을 다니게 되었단다. 재수 끝에 결국 엄마의 오랜 숙원이었던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으나 자기 방에서 투신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엄마 원하는 대로 다 했으니 이제 됐어?


가슴이 철렁했다. 카더라 통신인줄로만 알았던 그 사건이 가까운 사람의 실제 사건이였다니 더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극단적으로는 아니지만, 혹시 나도 알게 모르게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을 한 적은 없는지 반성했다. 사실 나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면 괜찮아.'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말도 결코 바람직한 말이 아니다. '최선'의 기준은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최선을 다했다면 괜찮아'라는 말 뒤에 '그런데 넌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라고 단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최선을 다한 게 아니잖아."

"최선을 다 했는데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문제를 틀려?"

"최선을 다했으면 이럴 수가 없지"


이렇게 글로 적어놓고 보니 더 소름 끼치도록 폭력적인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 백번 양보해서 변명을 하자면, 몰라서 틀린 것은 알아가면 되지만 알고도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집중력이 떨어져서 아는 것을 실수로 틀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은 들은 아이는 울음보가 터졌었다. "나는 최선을 다 했다고. 엄마는 내가 최선을 다 했다고 해도 안 믿는 거잖아."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이렇게 울어버리고 나서는 금세 말간 얼굴로 나에게 안겨서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종알종알한다. 속상한 건 속상하다 얘기하고 좋은 건 좋다 얘기해준다. 이토록 부족한 엄마를 아이는 진심으로 신뢰해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 아이가 누군가가 혹은 사회가 원하는 대로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정작 내가 아이에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걸 강요하고 평가한건 아니었는지 진심으로 반성해 본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너무 매몰되어 정작 우리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걸 놓치고 있는건 없었는지 생각해 본다.


엄마가 을 사랑하는 데에 이유가 없듯이 우리 아이들도 그냥 '엄마' 라서 사랑하는 거지 '좋은 엄마'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엄마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살포시 내려 놓아 보자.


아들~ 잘난 아들, 멋진 아들, 착한 아들 아니어도 괜찮아.

너는 너 자체로, 지금 있는 그대로 너무나 사랑스럽단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서툴러서 미안해.

기다려주는 엄마, 믿어주는 엄마, 곁에 있어주는 엄마, 그런 엄마가 될게.


엄마로서 우리 아이에게 해주어야 할 것은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사주고 좋은 것을 해주는 게 전부가 아니라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한없이 사랑해 주는 것임을 잊지 말자고 오늘도 다짐, 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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