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만 되면 차라리 특근을 하거나 출장을 가고 싶다고 말하던 여자 선배들이 있었다. "내가 미쳤다고 남의 집 가서 설거지를 하냐? 차라리 출근하는 게 나아. 맛난 거 먹자 그날." 물론 일이 많기도 했지만 그래도 명절 연휴라면 쉴 수도 있는데 차라리 출근을 하겠다는 선배들의 말이 사실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명절은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밥 먹고 연휴기간 내내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시간이자 오래간 만에 만나는 사촌 언니, 오빠, 동생들과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아이스크림이나 치킨을 걸고 윷놀이나 볼링 게임도 하며 재밌게 노는 즐거운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그 말이 완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이했던 추석명절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추석 이틀 전에 시댁에 가서 하루를 자고 추석 하루 전에 큰댁으로 갔었고, 큰댁에서 하루 종일 명절 음식을 만들다 보니 계속 드는 생각이 있었다. 명절 당일에도 계속 그 질문은 바로....
'난 누구? 여긴 어디?'
사실 엄밀히 따지면 요리 솜씨 좋고 손이 빠르신 시어머니가 음식을 대부분 하셨기 때문에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몇 번을 상을 보고 나니 해도 해도 설거지 거리가 계속 나왔지만 그래도 사람이 못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억울하고 슬프고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를 서울로 오면서 혼자 살기 시작한 나는 학교 다닐 때는 학과 공부하면서 학교 안팎으로 여러 활동을 하느라, 직장을 다니면서는 일하느라 바빠서 명절 때 말고는 부모님 댁에 자주 내려가지 못했다. 그래서 집에 가면 평소 가까이서 엄마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들어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날이 오는데 뭐하러 지금부터 설거지 하노.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엄마가 할게."
아마도 엄마는 내가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분명히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고, 남들이 보면 이런 부당한 상황이라면 절대 참지 않고 가족을 해체시켜버릴지도 모를 폭탄선언을 하고 박차고 나갈 것처럼 보이는 똑 부러지고 당찬 스타일이지만 사실은 가족을 먼저 생각하느라 그러지 못할 여린 마음의 딸이라 혼자서 끙끙 힘들어하면서도 결국은 남들이 정한 '며느리의 할 도리'라는 걸 다 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기에 '지금은 엄마가 다 할 테니 너는 쉬어라'라고 하셨나 보다. 설거지를 하다가 '아,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이 이런 거였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도 들고, 엄마도 보고 싶고...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나도 귀한 딸인데... 나도 우리 엄마 아빠가 정말 최선을 다해 키워주신 귀한 딸인데... 내가 왜 여기서 지금 하루 종일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지? 정작 이 집 안 남자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왜? 왜? 이걸 박차고 나가? 말아? 내가 나가면 시댁에서 나 불편할까 봐 늘 신경 써주시는 시부모님이 곤란해지시겠지? 우리 남편은 미안해하려나? 화를 내려나? 아니, 지금 여기서 제일 억울한 건 난데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먼저 걱정해야 하지? 온갖 생각이 드는 동안 설거지가 끝나 버렸다.
마음만 혼란스러운 채 멍하게 서있는데, 형님이 부르시더니 이제 과일을 깎아서 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이걸 왜 하지? 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이미 필요 이상으로 정성스럽게 과일을 깎고 있었다. 어른들 먹을 큰 접시 하나, 아이들 먹을 큰 접시 하나, '그래, 명절이니 같이 모여서 얘기도 하고 그러려면 다과상이 필요하니 그 정도는 괜찮은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데, 이제는 각 방에 들어가 있는 아주버님들께 드릴 과일을 따로 담아야 한단다.
"그냥 나와서 같이 드시라고 하시면 안 되나요? 각자 방 안에서 TV 보고 계신 분들 것까지 따로 상을 봐드려야 해요?"
나의 머릿속 생각이 필터 없이 입 밖으로 툭 나온 순간, 주방은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결국 형님들이 과일을 더 깎아서 그분들께 갖다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그 후 명절부터는 따로 과일을 방에 갖다 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나만 나쁜 거야? 나만?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뭔가 내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정말 이해가 안 되는걸 안 해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명절에도 시댁에 가서는 어머님이 이미 다 해 두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설거지랑 과일 깎는 정도만 했다. 아이들 봐줄 테니 둘이서 여유 있게 영화라도 보고 오라고 해주셔서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왔다. 사실 어머님은 결혼 초기부터 이렇게 해주셨는데, 이상하게 그때는 그것도 뭔가 불편했었다. 그나마 시부모님 댁에서는 괜찮았지만 큰집에만 가서 차례를 모실 때면 그 집안 며느리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라는 명문화되지도 않았고 당사자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사회적 역할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결혼하고 나서는 명절 자체가 싫어졌던 것 같다.
결혼 13년 차가 되니 이제는 명절에 시댁에 가면 아이들 봐주시니 맘 편히 영화도 보러 갔다 오고 정말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서 누워 있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내일 명절 당일이 되면 시댁 큰집에 가서 부억데기가 되어 음식을 내고 설거지를 해야 할 것이다. 일 년에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두 번밖에 안 되는 명절에만 하는 건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몇 번을 해도 이런 식의 명절은 늘 스트레스다.
명절날 힘든 것은 사실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명절만 되면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없어지고 갑자기 '어느 집안은 며느리' 로서의 의무만 부여받게 된다. 게다가 그런 역할에 대해 의문도 불만도 표현하지 말고 가족을 위해 그 의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마음이 힘든 것이다.
가족, 친척들이 오래간만에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은 사실 참 좋은 날이다. 바쁘게 살다 보면 형제자매 간에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사촌지간에도 서먹해지기 쉬우니, 이렇게 명절에라도 함께 모여 사는 얘기도 하고 맛있는 밥도 먹으니 얼마나 좋은 날인가.
문제는 가족 모두가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 명절날, 그 가족의 일원 중 누군가(며느리)는 그 명절 때문에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명절 자체를 싫어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가족이라면 가족 중 누구에게도 의무만을 강요하고 그 사람들의 희생으로 명절을 보내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집으로 갈게, 너는 너희 집으로 가서 명절 보내."
그렇다고 이런 것도 너무 극단적이라 싫다. 친정과 시댁을 우리 집, 너희 집으로 정의하고 각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차라리 더 합리적이지 않냐는 의견도 있지만, 이렇게 해버리면 왠지 가족이 행복해지는 명절이 아니라 가족이 해체되는 명절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며느리만 힘든 명절 문화는 싹 다 갈아엎어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 함께 즐겁게 명절을 보냅시다~라고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것도 쉽지 않다. 여러 세대가 함께 변화해야 하는데 산업과 과학의 발전 속도와는 달리 가치관과 문화는 그 변화의 속도가 참으로 더디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가족관계도 더욱 개인주의화되고 있다. 명절의 의미가 점점 더 퇴색되고, 명절에 부부가 싸우고 가족이 싸우느니 차라리 명절이 없는 게 낫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또한 더 이상 설거지를 하지 않겠노라 선포하고 시댁에서 보내는 명절을 보이콧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래도 나는 명절을 싫어하고 싶지 않다.
명절에 찾아뵙는 것만으로도 우리 신랑을 잘 키워주신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아들 내외와 손자들을 볼 수 있으니 즐거워해 주시니 감사하고, 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자주 못하는 친정집에 적어도 일 년에 최소한 두 번은 내려가서 엄마 아빠, 동생을 볼 수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1. 과일은 다 같이 모여 앉아서 먹읍시다. (개인상차림 없음!)
2. 송편은 함께 빚읍시다.
3. 제사 음식을 같이 만듭시다. 남자들이 요리에 익숙하지 않다면 밤 까기나 동그랑땡 만들기라도 꼭 하도록! (사실 여자라고 요리를 다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도 아닌데... 함께 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분담하는 걸로!)
4. 첫 번째 설거지를 여자들이 하면 두 번째 설거지는 남자들이 합시다. (일하는 사람 따로~ 대접받는 사람 따로~ 이런 거 이제 없음!)
5. 남자들만 먼저 밥 먹고 여자들은 나중에 밥 먹는 거 하지 맙시다. (준비도 같이! 먹는 것도 같이! 정리도 같이!)
우선 이렇게 다섯 가지를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공감을 얻어내면서 계속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족 문화가 변하도록 노력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런 당연한 것들을 하는 걸 노력해야만 하는 상황이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짜증 나고 싫으니 난 안 할래 라며 포기해버리는 것보다는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니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1번에서 2번 사이에 머무르고 있지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5번까지 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왜 여자만 이렇게 이해하고 노력해야 하냐고 억울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냥 포기해버리면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으니까, 엄마인 내가 노력하면 적어도 우리 가족의 문화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만들어 물려줄 수 있으니까, 이렇게라도 하나씩 바꾸어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먼 훗날 그런 작은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나중에 내가 나이가 들어 우리 아이들이 가정을 이루게 되었을 때에 우리 아들 부부내외도 명절을 의무감에 스트레스받는 날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는 즐겁고 행복한 날로 생각하는... 명절을 기다리게 되는 우리 가족만의 문화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듯 우리네 명절도 가족들이 기다리는 즐거운 날이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