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춤을 춘 이유를 기록하다
'마법의 가을'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있는 말은 아니고, 판타지소설 드래곤라자에서 나온 말이다. 인생 중 한 번, 그 가을에 들어선 사람에게는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별의별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올해 나의 가을은 조금 일찍 시작했다. 정확한 날짜도 기억한다. 그것은 8월 7일이었다.
최악의 여름이 끝난 날이라고 해도 되겠다. 여름 내내 회사도 싫고 사람도 싫고 일상도 싫었다. 그러다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오래된 문제들과 새로운 문제들이 겹쳐서 꾸덕꾸덕 굳어져 갔다.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더러워진 원룸 같았다. 7월 18일의 일기에는 내 자신이 바퀴벌레 같다고 적었다. 지옥 같던 회사는 제 발로 나온 게 아니었다. 회사가 나를 정리했다. 지긋지긋하던 자취방도 스스로 나오지 않았다. 계약이 만료됐을 뿐이다.
회사에서 나올 땐 에코백 하나에 그간 짐을 다 챙겨 나왔다. 내 자리에 정을 주지 않으니 갖다 둔 물건도 없었다는 사실을 짐을 싸며 새삼 깨달았다. 삼 년 살던 방에서 나오면서도 이삿짐은 단출했다. 콜밴 한 대를 불러서 혼자 다 옮길 수 있었다.
스물 한 살 자취를 시작한 이후 막연히 돌아오지 못할 것 같던 안산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만료'의 타이밍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싶다.
'안산 무용 학원'을 검색했다.
일상이 너무 싫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내 것을 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 것이 뭔지 아직 모르면서도 항상 내 것이 하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매일 남의 것을 하느라 내 것을 할 시간이 없었다. 춤을 배우는 일은 내 것의 범주에 들어 있는 것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던 여름의 아침마다 '지금 일어나서 가야지 오늘 저녁에 발레 하러 갈 수 있다!'고 새겼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저녁시간은 춤이 아닌 야근과 피로가 차지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도 국립현대무용단의 무용학교 워크숍만큼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 워크숍에서 어느 날, 커다란 바위에 짓눌리는 움직임을 시켰다. 존재하지 않는 바위에 눌리는데 '정말로 무겁고 아팠다'. 동시에 생각했다. 이런 생생한 움직임만 주구장창 하면서 살고 싶다.
그 마음을 갖고 무작정 무용학원 상담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저는 당분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매일 춤만 배우고 싶어요.' 선생님은 나를 전공반에 받아 주셨다. 학원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두들기고 릴레이 회의를 하는 일이 더 이상은 끔찍했기 때문에, 맨발로 뛰어다닐 수 있는 태권도장 보조사범 일을 시작했다. 역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생소한 선택이었다.
아르바이트와 학원수업을 시작한 날이 바로 8월 7일이었다.
올해 단풍이 유난히 예뻤다.
안산은 전국에서 도심의 녹지율이 가장 높은 도시다. 집과 도장과 학원을 오가는 길에 단풍나무가 잔뜩 있어서 실컷 보며 다녔다.
4개월 동안, 하고 싶은 것들로만 채운 일상도 업무가 되고 연습이 되면 다시 지겨워지기 마련이란 것을 알았다.
몸이 아프더라도 연차가 없는 알바는 꼬박꼬박 나가야만 했고, 무용학원에 가면 매일 새로운 부위의 멍과 근육통, 그보다 아픈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낯선 사람을 보고 데굴데굴 눈동자만 굴리던 태권도장 어린이들은 금방 마음을 열고 사랑을 퍼부었다.
말 그대로 퍼부었다. 사랑이 무형의 것이 아니라 액체 같은 것이었더라면 나는 그 넘치는 양을 감당치 못하고 풍덩 빠져 허우적대고 말았을 것이다.
매사에 평가를 내리고 꼬투리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태도들, 가면 같은 미소들, 그 아래 오래 삭은 분노와 짜증들, 그런 걸 참아내는 것이 대인관계를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부족하고 못난 사람,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깟 기준, 아이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수업을 잘 하든 말든 상관 없었다. 가식적인 미소나 빈말 같은 것도 없었다. 가면 아래 숨겨진 짜증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걔네는,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운다. 대개는 좋은 일이 더 많은지 까르르 웃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데 필요한 어느 정도의 기간, 친함의 정도에 따라 지켜야 할 물리적 거리, 그런 것도 단숨에 무너뜨려 버렸다. 서 있으면 허리춤으로 안겨 들어왔고 앉아 있으면 무릎 위에 앉아 버렸다. 깜박이도 안 켜고 훅. 온 몸으로 온 얼굴로 '좋아해!'라고 말해 줬다. 정작 나는 스스로를 싫어했는데 말이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나 하는 고민도 할 새가 없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게 되면 온 몸으로 온 얼굴로 '고마워!'라고 답해주게 되는 것이다. 그 따끈하고 말랑하고 사랑스런 존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고 한 번 더 꼭 안아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시간을 때울 만한 적당한 화제를 생각해 내느라 머리 아플 일도 없었다. 아이들의 속에는 언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나는 들어줄 귀를 열어두기만 하면 되었다. 너무나 쉽고 즐거운 일이었다.
무용수업은 고상하고 우아하거나 마냥 흥 넘치는 시간이 아니었다. 차라리 태릉선수촌 등지에서 벌어지는 일분일초 자기와의 싸움, 뭐 그런 것에 더 가까웠다. 스트레칭도 근력운동도 바워크도 센터워크도 점프도 롤링도 턴도, 신물 나고 다리가 풀리고 눈앞이 핑 돌만큼 힘들었다. 하는 동안에는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반복되어도 수업시간은 흐르고 그 날 분의 연습은 어김없이 끝이 났다.
그것보다 힘든 것은 춤을 추면서 매일 새롭게 발견하는 내 모습이었다. 연습에 게으르고 스스로를 믿지 않고 쉽게 포기하고 두려움이 많고 집중력이 약하고 조급하고 순발력이 부족하고,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그런 나랑 매번 마주봐야 했다. 숨거나 도망갈 데도 없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내 몸이 드러내는 내 삶의 흔적이어서.
그렇지만 옆에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의 피드백은 물론 무섭다. 그러나 그것은 비난도 지적도 아닌, 피드백이다. '너 왜 그렇게 해!'라는 두루뭉실한 분노 표출이나 '넌 글러먹었어'라는 빠른 포기가 아니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뜯어보아 고칠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족한 점을 직면해야 하지만, 빠르고 쉽게 나아지지도 않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누군가의 분풀이로 공중에서 흩어지거나, 아물어도 흉터 따위밖에 되지 못할 상처로 남는 것이 아니라, 더 괜찮은 나에게 이르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엉망으로 추어도 선생님은 내 춤을 계속 계속 봐 주셨다. 바닥에 발을 붙이고 공중의 공기를 안으면서 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보셨다. '무서워요, 모르겠어요, 까먹었어요, 확신이 없어서 더 나아가지 못하겠어요' 같은 부정의 언어였을지라도.
그런 것을 내보이고도 '그럼 여기서 관둬'가 아니라 '그럴수록 좀 더 연습해'를 듣는 일은, 어쩌면 지지받고 수용받는 경험인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첫눈이 내렸다.
한 계절을 이렇게 보냈다.
가을 이전의 나는,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이 가을을 보낸 지금의 나는, 괜찮든 괜찮지 않든 상관 없이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오늘 괜찮지 않은 부분도 연습해서 언젠가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면 괜찮아진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이 가을 내내, 당장 은혜를 척척 갚는 잘난 딸이 아니어도 나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가족이 곁에 있었다.
정상이라고 느껴지는 궤도에서 달릴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이 궤도에서 내려오면 부모님이 나라는 사람 자체에 크게 실망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 나이에 알바도 학원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긋난 길 같아서, 집에서조차 조금은 나를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깨끗이 빨래된 도복이나 세 끼 밥, 학원 수업 후 늦은 귀가를 기다려 주는 것, 그런 일상의 순간들이 예전과 다르지 않게 계속되었다. 당연하지 않다. 고마운 일이다.
아르바이트는 12월 중으로 그만둘 예정이다. 전공반 수업도 언젠가는 취미반만 듣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 아직도 알 수 없는 미래는 막막하고 두렵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