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혹은 원수
2022년 새해 첫 훈련이다.
그저 연도에 한 자릿수가 바뀌었을 뿐인데 마음이 호들갑을 떤다.
늘 새롭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는데 괜스레 달라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기는 첫 달이다.
그렇게 2022년 1월 8일 2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훈련을 가는 동안 내내 떨렸다.
어디서 오는 떨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유난히 떨린다고 메모해 둔 것을 보니 본격적인 동계훈련을 앞두고 있어서 긴장한 탓일까?
빙벽이 어렵게 느껴지는 내가 과연 이 훈련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부딪혀 보자 하는 마음으로 8차 훈련까지 견뎌냈는데 앞으로 겨울 훈련은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도무지 모르겠다.
불안에 나를 가두지 않기로 한다.
주차장에 집결한 후 대장님께서 들고 오신 삼중화와 텐트를 보며 앞으로 훈련의 무게를 짐작해 볼 뿐이다.
야영지에 도착하여 텐트칠 곳부터 찾았다.
적당해 보이는 곳을 골랐으나 경사도가 있어 오늘 잠도 쉽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곧바로 국망봉을 향해 하중 훈련을 시작했다.
가벼운 몸으로도 걷기 어려운 경사였는데 그토록 가파를 줄 전혀 몰랐다.
눈과 얼음으로 미끄러운 곳에 이르자 대장님께서 크램폰 착용을 지시했다.
가파른 데다 익숙하지 않은 장비를 착용하려니 시간이 꽤 흘렀다.
크램폰을 준비하지 않은 대원들을 향해 대장님의 따끔한 한마디가 산을 울렸다.
장비의 중요성을 호통과 당부로 알려주시는 마음과 답답한 심정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데도 느껴진다.
무거운 크램폰을 차고 경사가 심한 국망봉을 오르는 일이 꽤나 힘들었다.
더군다나 단장님의 신기에 가까운 발 빠른 구력을 쫓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리니 어느새 단장님이 시야에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이 찬 데다 눈까지 날리는데도 땀이 흘러내렸다.
발가락은 쪼이고 뒤꿈치는 흔들거리니 한 걸음 딛는 것이 여간 불편했다.
나를 지나쳐 오르는 사람들을 따라 국망봉 정상에 이르니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잠시 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뒤이어 오는 동료들을 볼 때까지 배낭을 벗지 말라는 대장님의 지시가 떨어진다.
막간을 이용해 김미곤 대장님과의 대원들 간의 포토 타임을 열였다.
한 장당 입금 가격을 건진 씨가 이야기하자 힘든 중에도 모두들 빵 터진다.
9회차 훈련이 오는 동안 한 번도 대장님과 제대로 된 사진이 없었던 터라 국망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한 컷씩을 남겨두었다.
나도 한 장 남기고 싶었는데 이 놈의 쑥스러움 때문에 마음으로만 수백 장을 찍고는 내려왔다.
서둘러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몸도 길도 좀처럼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오름이 가팔랐으니 내려감은 더욱더 어려워 결국 뒤꿈치에 물집이 잡혔다.
빙판길에 이르니 이 다리로는 도저히 힘을 쓸 엄두가 나질 않아 홀로 길을 돌아서 걸었다.
뒤따라온 대장님이 왜 거기로 가냐고 물으시니 물집 핑계를 대고 나니 괜히 부끄럽다.
가상이나마 베이스캠프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장대부 이사님의 만들어주신 어묵탕 국물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훈련 내내 결국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생각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나를 붙잡아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늘 이렇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따뜻함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어 가능했다.
고마운 마음을 간직한 채 텐트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고는 젊은이(?)로만 꾸려진 3조 텐트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이런저런 산 경험이 많은 작은 민수 씨가 솔선수범하며 자신이 다 준비하겠다고 나선다.
지난번 라면을 끓일 때도 그러더니 여러모로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친구다.
기울어진 텐트에서 쪼그리고 앉아 먹는 음식은 불편해도 꿀맛이었다.
만든 음식이 남을까 강제 배식을 했더니 대원들 모두가 너무 많다며 아우성이다.
잘 먹을 거면서... 그래도 웃으며 다 먹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평소 적게 먹는 안숙이가 감기로 인해 입맛이 더 없는지 잘 못 먹어 마음이 쓰였다.
얼른 괜찮아져야 할 텐데 억지로라도 더 먹으라고 권했으나 먹는 둥 마는 둥이다.
혜정이가 준비한 돌배주를 한 모금을 하는 찰나 다시 집합을 했다.
각자의 산을 마음에 품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모두의 바람이 힘룽 히말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9차 훈련의 밤이 이렇게 깊어간다.
단장님께서 원정 경험을 들려주신다.
원정을 가면 딱 2가지라고.
원수 아님 인연이 되어 돌아온단다.
한 사람 한 사람 함께 걷는 이들 모두가 너무나 궁금한데 극한의 상황에서는 원수가 되기도 하는 걸까?
인연으로 남는 이들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도대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장대부 이사님께서 종종 들려주시던 Are you OK?라고 누군가 묻는 것조차 짜증이 난다더니...
직접 부딪혀보지 않는 이상 생각만으로는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수긍이 가질 않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향한 지금 이 마음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소중한 인연으로 남을 대원들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았다.
원수를 지우고 인연으로 남겨야겠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각자 텐트로 돌아가 이야기꽃을 피우다 어디선가 작은 민수 씨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근엄의 대명사로 보이는 강신원 이사님이 저렇게 누군가를 다정하게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새삼 놀라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자주 놓친다.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기를 바란다.
처음으로 여자 넷이서 한 텐트에서 잘 생각을 하니 재미있겠다 싶은 설렘이 무색하게 그날 훈련이 고되었는지 기억할 새도 없이 잠이 들었다.
잠결에 대원들의 얕게 코 고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느새 아침이다.
아침부터 마주한 빙벽 어센딩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도무지 크램폰이 박히질 않는데 미끄러운 빙판 위를 죽음 힘을 다해 쾅쾅 찍으라는 연맹 이사님이 시범이 대단해 보인다.
대장님은 평지를 걷듯이 경사가 있는 얼음 위를 자연스럽게 내려오신다.
우리도 저렇게 되려면 그야말로 괴물이 되어야 하나 보다.
이리저리 구르기도 하고 얼음 꽝꽝 힘룽 히말을 외치고 나니 하산할 시간이 다가왔다.
체력 괴물이 되어 힘룽 히말 상비군들과의 인연을 오래 이어가고 싶은 욕심이 든다.
이런 욕심은 실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