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선 Jan 20. 2019

타인의 취향

푸르고 선선한 저녁이었다. 불어오는 북풍이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낭만적인 공기가 넘실거리는 길은 온통 음악과 그 음악에 발을 구르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L은 온종일 피곤했던 하루의 끝을 집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으며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들뜬 목소리로 자신을 밖으로 불러내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이 낭만적인 저녁을 낭비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젊고 활기차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그래, 아까운 밤이지. L은 혼잣말을 하며 커튼을 걷어 창문 밖을 슬쩍 내다봤다. 설령 눈으로 보는 것들이 항상 진실인 것은 아니라고 해도 번화가 앞에 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을 의식하게 되는 법이다. 그녀는 침대가 자신을 끌어들이는 늪이라도 된다는 듯 순식간에 몸을 튕겨 일어나 화장대에 앉았다. L은 텐션을 올리는 음악을 틀고 컨실러와 몇 가지 도구로 작은 얼굴에 파랗게 늘어진 피곤을 팽팽하게 당긴 다음 맵시 있는 옷을 골라 밖으로 나갔다.


"러시아 출신 디스코 DJ래. 요즘 힙하다고 하는 DJ인데 이번이 첫 내한이야."


긴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트리고 어깨가 길게 트여있는 옷을 팔랑거리며 유주는 L의 귀 옆에서 큰 소리로 계속 이야기했다. 주변 상가의 음악이 너무 커서 L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L을 불러낸 이유에 대해서 조금 멋있게 둘러대고 싶었기 때문에 유주는 오늘 공연을 보러 가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올 예정인지 따위의 내용을 덧붙였다.


"난 조금 취기가 있어야 더 재밌을 것 같아"

 

편의점에 들러 산 과일 소주에 빨대를 꼽아 목구멍으로 꼴까닥 꼴까닥 넘기는 유주의 옆에서 L은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가 으쓱해 보이며 약간 따분한 얼굴로 발을 까닥거렸다. 편의점 앞 바닥의 더러운 쓰레기와 먼지들이 자꾸 바람에 쓸려왔기 때문에 L은 눈을 자주 깜빡였다.


발목까지 내려와 핏 되는 트렌치코트와 품이 약간 벙벙한 오버핏의 가죽재킷을 입은 남자들이 왁스로 뭉쳐 고정된 머리를 모이를 쪼는 닭처럼 내밀고 편의점 앞을 무리 지어 지나갔다. 여러 가지의 향수 냄새, 술냄새와 담배냄새, 가을 저녁의 신선한 공기가 섞여 흥청망청한 젊음의 거리 특유의 냄새를 만들어냈다. 무리를 지어 있는 젊은 남자들이 또래 여자를 의식할 때 흔히 그러듯 그들은 주머니에 넣은 팔을 날갯짓하는 것처럼 더 크게 흔들고 다리를 한껏 벌려 어기정 거리며 걸었다. 별 것 아닌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 거의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 멈춰 담배를 한 대 피우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맙소사, 우리는 언제까지 여기에 앉아있어야 하는 거지. 이제 공연이 시작할 시간이 되지 않았나. L은 자신의 푹 수그린 정수리 위로 따갑고 능글맞게 박히는 시선을 흐린 눈으로 흘려보낸 채 유주에게 자리를 옮기자는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곧 유주가 남자들의 시선을 새침한 표정으로 즐기며 천천히 알코올의 농도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해야 했다.


"너 이번에 세기소년 2집 나온 거 들어봤어?" L은 유주가 과일 소주를 다 마실 동안 이야기할 거리를 겨우 찾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좋아하는 인디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 홀로 클럽을 전전하다 유주를 처음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유주의 관심이 음악보다는 파티와 쿨한 사람들에게 더 맞춰져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아 그거? 나는 안 들어봤어.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저기서 난리던데, 나는 유명해진 인디밴드 노래는 잘 안 들어서"


"뭔지 알 것 같아. 유명해지고 방송에 나오기 시작하면 조금 변해버리더라고. 잔나비 같은 경우에도 예전에는 앨범에 실험적 음악이 가득했는데 유명해지기 시작한 후로 제일 먹히는 류의 음악만 주구장창 내는 거야. 들어보면 다 똑같은 노래 같아서 언제 끝나고 언제 다음 곡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웃긴 건 원래 잔나비 본인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했던 스타일의 음악이 바로 그런 음악이었다는 거야. 뭐, 그래도 어떻게 해. 예술가들도 돈은 벌어야 되니까."


유주는 L의 질문을 가볍게 튕겨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쏟아져내려 온 L의 말에 약간 멍해져 까맣게 칠한 큰 눈을 느리게 두 번 껌뻑 껌뻑 떴다.


"아,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한데.. 난 그냥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듣기 싫어져. 우르르 몰려서 좋다고 하는 거에 따라 쓸려가는 게 마음에 안 들거든."


"음.. 그래? 그런데 이번 2집 듣고 나는 놀랬어. 1집 때 하고 완전히 달라졌어. 보컬이 작사 작곡 다 했다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있었던 것 같더라. 진짜 좋았어."


"그냥, 난 사람들이 우르르 좋다고 평가하는 음악은 좀 과대평가되는 점이 있는 것 같아. 별로 대단하진 않지만 솔직하고 지질한 음악을 해서 좋았던 밴드가 유명해진 뒤에 엄청 호평받는 걸 보고 좀 웃겼던 적이 있어. 평론가가 영혼의 순수함 뭐 허를 찌르는 일상의 통찰력 어쩌고 하던데 걔들 사실 그냥 바보거든.."


유주는 과일소주의 마지막 모금을 넘기며 웃다 사례가 걸려 켁켁거리며 말했다. "바보라서 영혼이 순수한 건가.. 어쨌든 세기소년 2집은 한번 들어볼게. 너 때문에 궁금해졌다 야. 나 다 마셨는데 이제 슬슬 들어갈래?"


공연장은 시커먼 컨테이너 박스같이 생긴 건물 안이었다. 대기 줄이 길까 싶어 걱정했지만 조금 늦게 도착한 바람에 L과 유주는 아무도 없는 입구를 통과해 공연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레이저 광선으로 된 핑크색 창살을 흠칫거리며 통과하자 어두운 공간에 묵직한 베이스와 몽롱한 보이스가 쾅쾅 울렸다. 러시아 출신이라는 DJ는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워가며 디제잉을 했다. 퇴폐적으로 생긴 DJ가 단발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L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주는 취기가 적당히 올라 벌써 단조로운 비트에 몸을 흔들었고,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엉뚱하게 붙여놓은 꼴라쥬같이 얼빠진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앞쪽의 키 작은 외국인이 가죽 탑을 입은 마른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다 실패하자 입맛을 다시며 퀭한 하이에나 같은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L과 눈이 마주쳤다. 금세 눈을 피해서 일부러 DJ에게 시선을 고정한 L 앞으로 외국인이 엉성하게 몸을 흔들어대며 다가왔다. 흐린 눈으로도 보이는 몸짓에 L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으, 뭐야.


"좀 뒤로 가자."


춤을 추는 유주의 귓가에 대고 크게 말하자 유주는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으로 가자 사람들이 더 촘촘하게 서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앞쪽에 있었던 사람들과 다르게 술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노는 분위기에 L도 긴장을 풀었다. 은색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목에 달고 레게머리를 한 남자와 목폴라에 반팔티를 레이어드하고 버킷햇을 쓴 남자가 앞쪽에서 몸을 격하게 흔들었다. 비트가 더 쿵쿵댈 때면 자기들끼리 소리를 질렀고, 디제이를 향해 어떤 손짓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했다.  유주도 이 분위기에 신이 났는지 옆에 있던 모르는 여자 앞에서 과격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자는 웃으며 대충 유주를 받아주었지만 생각보다 유주의 난입이 길어지자 당황스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여자가 자신의 친구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자 L은 이를 지켜보다 유주의 팔을 끌어 제 자리로 돌려놨다.


"야 이리 와"

유주는 L이 산통을 깨는 분위기 파괴자라도 되는 둥 눈을 흘기며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야 원래 다 이렇게 노는 거야"

"저 사람이 당황스러워했어."

"뭐라고? 잘 안 들려. 야 원래 다 이렇게 노는 거야."

"저 사람이.. 아니야 됐어."


유주는 불어 나온 입술을 집어넣고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억울해하는 자신의 심정을 L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꼭 내가 이상한 애 된 것 같잖아. 내가 쪽팔린가. 그동안 L은 마약을 한 듯이 흐느적거리는 유주의 옆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음악은 계속해서 똑같은 비트를 변주 해대며 지겹게도 쿵쿵거렸고, L의 취향은 이런 류는 아니었다. 신나지도 않는데 춤을 추기도 뭐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이나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이 사람들은 진짜 이 디제잉이 마음에 드나? 별로인 것 같은데. 난 디스코 음악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L은 유주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무아지경에 빠져 반복적으로 어깨를 흔들며 끄덕끄덕 하는 유주의 옆에서 벗어나 L은 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L의 손목을 탁하고 세게 잡았다. 불쾌한 감정에 조금 올려다보니 검은색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L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세게 남자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남자는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크레인으로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인형을 움켜쥐었으나 인위적으로 흔들리는 크레인 때문에 다시 떨어지는 인형을 보는 아이처럼 입을 바보같이 벌리고 L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L은 발걸음을 빨리 해서 그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남자가 어떤 이유로 L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남자는 낯선 남자에게 인형같이 손목을 낚인 L이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와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이전 세대에는 낭만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사라지고 없다. L은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검은 마스크를 턱에 건 지질한 남자도 이런 곳에만 오면 당연히 누군가를 초이스 할 권리가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발을 세게 밟아주는 건데.


구석에 앉을 수 있는 계단이 있어 그곳에 잠깐 앉은 L의 옆에서 어떤 여자가 야광봉 두 개를 이리저리 현란하게 돌리고 있었다. 호루라기도 입에 물고 있었는데, 휘청거리는 게 축을 잃은 팽이 같다고 L은 생각했다. 그 옆에 서있던 한 남자는 병맥주를 마시다 다시 뱉으며 종이조각처럼 얼굴을 구겼다. 갑자기 숏팬츠를 입은 긴 머리의 여자가 나타나 흐느적대더니 L의 다리를 베고 드러누웠다. 본격적으로 잠을 청하려는 기세였다. L이 흥미롭게 여자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가드가 다가와 이 여자의 일행이냐고 물어왔다. 팔로 큰 X자를 그으며 웃는 L을 보고 가드는 한숨을 한가득 내쉬더니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여자의 일행은 그 주변에 없었다. 마침내 가드에게 업히다시피 끌려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지겨워진 L은 술을 좀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걸어갔다.


바는 북적였으나 생각보다 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L은 힘을 빼고 높은 의자에 털썩 앉아 턱을 괬다. 바텐더는 동료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면서 웃다가 L에게 주문할지 물었다. "라 루이지안느 돼요?" 바텐더는 잠시 재료가 있는지 체크한 후 말했다. "라이 위스키가 없어요." "그럼 대신 버번 넣어주세요. 달지 않게 해 주세요!" 순간 어떤 여자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어색해하는 L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갈라지기 시작한 손톱의 매니큐어를 긁어냈다. 보통이라면 시선을 보내오던 사람은 L의 한결같은 무시에 곧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곤 하지만 여자는 옆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귀엽게 L의 관심을 끌려했고, L은 여자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었다는 듯 짐짓 놀란 체하며 그녀를 마주 보고 로봇처럼 웃었다.


"재미있어요?"

단발머리의 여자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명랑하고 쾌활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입술이 도톰하고 커서 자꾸 시선을 끌었다.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런 것 같아요."

"음악 들으러 온 거예요?"

"네, 뭐. 디스코 음악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친구 따라왔어요 사실."


단발머리 여자는 L의 의도를 가늠해보겠다는 듯이 눈을 위로 굴리며 턱을 긁는 체했다. 그러더니 앞에 놓인 술을 죽 들이켰다. 여자는 민트와 로즈마리가 투박한 잔에 담긴 술을 마셨는데, 멀리서도 버번위스키의 향과 민트의 향이 강하게 났다. 여자는 혀로 입술을 한번 핥고는 말했다. "저는 이 DJ가 보일러 룸에서 디제잉하는 스트리밍 보고 왔어요. 너무 예쁘고 섹시해서 반했거든요. 근데 막상 오니까 음악은 별로인 것 같아요." 여자는 목을 크게 열어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흔히 들을 수 없는 기분이 상쾌해지는 웃음소리였다.


"예쁜 분이 특이한 술을 주문하길래 궁금해서 말 한번 걸어봤어요."


그 말에 L이 하하, 하고 웃으며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눈을 아래로 내려 깔았다. 예쁜 여자를 되게 좋아하는 타입인가 보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여자는 L을 살펴보며 재밌다는 듯이 눈썹을 조금 올리며 웃었다. 남자가 했으면 진부하고 끈적한 작업 멘트라고 느꼈을 것 같은데, 여자의 털털한 뉘앙스는 산뜻하고 발랄하기 그지없어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게 했다.


"항상 마시는 거예요?"


"아, 아뇨. 그러고는 싶은데 재료가 없을 때가 더 많아서.. 예전에 친했던 친구가 바텐더였는데 한여름에 땀에 젖은 저한테 만들어 준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허브향이 강하게 나면서 그다음에는 압생트 맛이 이국적으로 느껴지다가 끄트머리에 설핏 위스키 향이 남는데 정말 맛있게 마셨던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는 항상 마실 수 있는지 물어봐요." 되게 길게 말했네, L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칵테일 잔으로 다시 눈을 고정시켰다.


"오. 그렇게 말하니까 저도 마셔보고 싶어 지잖아요. 여기 이거랑 똑같은 걸로 한잔 더 주세요."

바텐더는 무슨 일이냐는 듯 L과 여자를 번갈아서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L은 점점 이 여자에게 호감이 갔다. 따분해지기 시작했던 이 장소의 빛깔이 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뜻해 보이는 호박색 빛 같은 아지랑이가 L의 주변을 맴돌다가 발 끝에 머무르더니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들 재밌게 노는 것 같아서, 혼자 생각했는데 저만 음악 별로인 거 아니죠? 저는 제가 디스코 음악을 잘 몰라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도 로드헤드 음악은 좀 좋아하는데."


"오, 맞아. 로드헤드 좋죠. 이 DJ가 얼굴로 유명세를 얻었다고 남자들이 조잘조잘거릴 때 짜증 났었는데 저 지금 약간 그 의견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아요. 근데 웃긴 건 실력 없는 남자 DJ가 유명해지면 얼굴 때문에 뜬 거라는 말 절대 안 하죠."

 

여자는 말할 때마다 몸짓을 아주 분명하고도 크게 바꾸었는데, 그럴 때마다 귓가에 달려있는 긴 모양의 귀걸이가 크게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L은 약간의 알코올기가 몸을 데우는 것을 느끼며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맞아요. 아, 여기 앉아서 술을 마시니까 좀 살 것 같아요. 아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관찰하느라 좀 지쳐있었거든요." L의 갑작스러운 자기 고백에 여자는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관찰이요? 무슨 관찰?"


"별 건 아니고, 그냥 여기 모인 사람들이 약간 공간에 붕 뜬 것처럼 어색해 보일 때가 있었어요. 특히 조명이 밝게 빛날 때 사람들은 어둠 속에 숨어서 나무인 척하다가 들킨 작은 개 같이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좀 우습죠." L이 '우습죠'라는 끝마디를 마쳤을 때 단발머리 여자의 눈은 천 개의 촛불에 비친 샹들리에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다가 무릎을 세게 치면서 또 깔깔깔 하고 시원하게 웃더니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고개를 빼 내밀고 말했다.


"있잖아요, 홍대병이라는게 불치병이에요. 한번 걸리면 낫지를 않거든요. 가끔 이 사람들을 보면 꼭 뭐에 씌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기 저 주머니 주렁주렁 달린 통 큰 바지 바닥에 질질 끌고 걸어가는 빡빡이 보여요?"


L은 남자를 찾기 위해 두리번두리번거렸으나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바지를 입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위로 올려 빡빡이를 찾아냈다.


"네, 보여요" 웃음기를 가득 담아 L이 대답했다.


"아니, 도대체 힙이 뭐길래 저런 옷까지 입어야 되느냔 말이에요. 쟤네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하나같이 이런 소리들을 해요. '유행하는 게 싫다' '대중의 흐름에 쓸려가는 게 한심하다' 그러면서 남들하고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지는 게 간지라고 생각해요. 그건 좋아요. 자기만의 매력을 가진다는 건 좋은 일이죠. 그런데 웃긴 게 뭐냐면 저런 통 큰 바지를 바닥에 질질 끄는 게 힙스터만의 유행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행이 싫어서 도망간 하위문화에서 또 유행에 휩쓸리는 거죠. 완전 머저리 아니에요?" 너무나 직설적이고 화끈한 여자의 의견에 L은 그만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라 루이지안느요."


칵테일을 뚝딱 만들어낸 바텐더가 잔을 여자의 앞에 내려놓고 흥미로운 눈초리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L도 여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했다. 여자는 술을 마실 때의 버릇대로 루이지안느를 쭉 들이키고 인상을 조금 찌푸리고는, 금새 '음!' 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활짝 웃었다.


"진짜 맛있네. 도수가 높은것도 완전 제 취향이에요. 왜 이 칵테일을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여하튼, 자기들은 힙스터 문화가 비주류 문화라고 굳게 생각하는데, 그 잘나신 힙스터 문화는 이미 주류문화에 흡수된지 오래란 말이예요. 더 볼 것도 없지. 힙스터는 자본주의의 허물일 뿐이에요. 한때는 주류에 반기를 든 혁명가였을 테지만 그건 이미 끝난 일이죠. 자본주의 산업이 섬세하게 짜낸 거미줄이 그들을 매달고 이용했을 뿐이에요. 그들이 말하는 반항정신은 이제 겁먹은 염소처럼 잠잠해진지 오래죠. 이제 그들은 비주류문화라기 보다는 통큰 소비자 집단일 뿐이에요. 쟤네는 '나는 독특하다' 라는 자아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난 애들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쟤네들 얘기를 들어보면 모든 말의 처음이 '나는' 으로 시작해요. '나는, 나는, 나는'. 그리고 그 '나는' 으로 시작하는 자기만의 편협한 생각이 무슨 대단한 예술적 통찰이라고 생각하는거예요."


그 말을 듣는 L의 머릿속에도 뭉그스름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었기 때문에 L은 작게 낄낄거리며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 뒤로 넘겼다. "그런 사람이 종종 있는 것 같긴 해요."


"그니까. 그런데 들어보면 사실 너무 고루하고, 흔해 빠진, 이 세상에 이미 넘쳐나고 마르고도 또 다시 넘쳐날 그런 평범하고도 평범한 생각들이죠. 사실 쟤네들도 그걸 알고있는게 아닐까요..? 본인들이 평범의 보편자라는 걸. 그래서 자기의 '독특해야 하는' 자아를 위탁할 곳을 찾아 헤매이는거죠. 자아를 위탁할 곳은 어디에나 있어요. 독립영화, 인디음악, 희귀한 담배나 술을 좋아하는 방법도 있죠."


L은 물끄러미 자신의 칵테일잔을 쳐다봤다. 어쩐지 여자가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는 잠시 인상을 쓰고 골똘히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L이 반박했다.

"정말 독립영화나 인디음악, 희귀한 담배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자아를 위탁하기 위한게 아니라, 그런 영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어떤 보석같은 것들이 있다고 해야하나? 저는 매년 언니와 같이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요. 사실 독립영화에는 관심이 없었어서 언니의 손에 이끌려 독립영화를 보게 됐죠. 모든 영화가 다 좋은 건 아니에요. 어설프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맥도 안잡히는 아마추어적인 작품들이 있어요. 그런데 매년 그 중에 하나, 그 중에 꼭 하나를 건져요.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언니와 나 둘 다 말없이 서로 빤히 바라보죠. 말 없이도 우리가 뭘 느꼈는지 공감하는 순간이죠. 그런 순간에 저는 엄청나게 설레고, 그 설렘이 느껴지는 순간이 너무 좋아요."


"아..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L이에요."


여자는 L의 말에 집중하다가 기쁜듯한 미소를 지었다. "L씨! 저는 안나라고 해요. 나는 L씨가 좋아요. 아까부터 조금 좋았지만, 지금은 더 좋아요. L씨 말이 맞아요. 물론 정말 영화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죠. 워낙 소수이고 주로 방에서만 서식하며 알고 지낸지 오래된 지인과의 조촐한 만남을 선호하기 때문에 만나기 힘들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매도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유명해지던 대중적이 되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그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


"L씨가 독립영화를 보고 느꼈던 그런 설렘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에요. 예를들어 그 영화가 갑자기 노미네이트 되어,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고 대중적으로도 성공했다고 가정해봐요. 그러면 L씨는 그 영화에서 얻었던 설렘을 잃어버릴까요?"


"그럴 일은 절대 없겠죠." L이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죠. 그런데 자칭 힙스터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 분개를 해요. '특별한' 자아를 만들기 위해 위탁했던 위탁소가 평범해져 버리는게 그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오거든요. '어이코! 하마터면 내 자아가 평범해질 뻔 했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되지. 앞으로 그 인디밴드의 노래는 절대 듣지 않을거야. 아무렴!' 하면서 본질을 훼손시키죠."


약간 과장하여 독백을 하는 듯한 안나의 말에 바텐더와 L이 동시에 작게 웃었다.


"그리고 또 다시 아무도 모를만한 것들을 찾아서 헤매이죠. 내가 알았던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면 자신의 힙스터적 취향을 한껏 뽐내고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악의를 뿜어대다가 자신이 갓 스피드 유 블랙 엠페러라는 외우기도 힘든 긴 이름의 밴드를 알고 있다는 것에 우쭐해 하고는 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는 쿰쿰한 냄새를 맡아본적이 저는 있어요. 그들이 그렇게 추앙하는 '독특함' 에서 나는 분리와 차별의 냄새죠. 저는 그 냄새를 맡을 때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진짜예요. 분리와 차별을 행하는 사람은 아주 많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요. 그런데 이들이 더 나쁘게 느껴지는 이유는, 본인들이 자본주의와 주류문화에 핍박받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대항해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가해를 하기 때문이에요. 주류가 되어버린 비주류 아티스트를 욕하면서, 주류문화에 흡수된 힙스터 문화에는 강한 애착과 소속감을 가지고 있죠. 어쩌면 이렇게 아이러니 한지! 전 이제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어요. L씨 혹시 담배 피우시나요?"


"그럼요."

L은 여자가 야기했던 상념에 꿈처럼 잠겨있다 화들짝 깨어나며 대답했다.

"같이 나갈까요?" 여자의 목소리는 오래된 휴대폰이 진동하듯이 잘게 떨렸다.

"좋아요" 둘은 얇은 차림으로 의자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좀비같이 반복적으로 흐느적 흐느적대는 사람들을 물고기처럼 피해 헤엄쳐 레이저 광선으로 된 핑크색 창살을 건너갔다.


따뜻한 곳에 앉아 술을 몇 잔 마셨기 때문에 밖은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둘은 손을 잘게 떨며 담뱃불을 붙였다.


"실은, 가족 중의 한명이 그런 타입이었어요."

"타입이라면? 방금 제가 신랄하게 비난한 비주류찬양자 말인가요?"


안나는 당혹스러운 체 하며 도톰한 입술로 보기좋은 선을 그리며 웃었다.


"네, 맞아요. "

"이런."

"오빠는 음악 애호가였죠. 제 언니가 영화 애호가인 것 처럼..그러고 보면 예술애호가의 피가 저에게도 흐르고 있을 수 있겠네요. 저는 딱히 어떤 분야만 깊이 빠져있지 않지만..어쨌든, 오빠와는 나이 차이가 조금 나요. 5살 차이가 나죠. 그래서인지 어릴 때 부터 저를 앉혀두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줬어요. 제 마음에 아주 쏙 들 때도 있었고, 별로일 때도 있었죠. 예를들어 MOT이나 언니네 이발관의 앨범을 듣고서는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그럴 때면 오빠는 아주 흡족해 하면서 자신의 훌륭한 취향에 도취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죠. 문제는 음악이 제 마음에 들지 않을 때였어요. 시이나 링고의 목소리는 저에게 좀 히스테릭하게 들렸거든요. 하지만 오빠에게 그 음악이 마음에 안든다고는 표현하지 못했어요. 그냥 음.. 하고 말을 얼버무렸죠. 그럴 때마다 오빠는 눈썹을 한가득 치켜뜨면서 '별로야? 너 음악 들을 줄 모르는구나. 멍청이. 실망이야.' 하고 고개를 훽 돌렸죠. 아직 제 방이 없었을 때라서 나는 오빠가 오빠의 방에서 놀게 허락해 주는 시간이 좋았는데, 오빠의 기분을 상하게 할 때면 나는 방에서 쫒겨나곤 했어요. 그리고 일주일, 길면 이주일동안 오빠의 방에 들어가는게 금지됐죠."


"뭐라고, 정말 끔찍하네요. 못된 놈. 이런, 미안해요. 그런데 너무 화가 나요."


안나가 울분에 가득 차 코를 새빨갛에 물들이면서 추위에 잘게 떨고 있던 몸을 더욱 거세게 파르르 떠는 것을 보면서 L은 안나의 팔을 덥혀주려는 것처럼 위아래로 빠르게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같이 욕해달라고 안나씨한테 말하는건데요. 바보같이 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제 취향을 잃어버리고 말죠. 제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싫어하는지 잘 모르게 되는거예요. 오빠의 취향을 그대로 복사한듯이 만들어지는거죠. 그런데 여기 웃긴 점이 있어요. 오빠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인디밴드의 새로운 앨범이 나오고, 유명해 진 후 오빠에게 그 밴드의 앨범을 들려주며 새로 나온 음악이 좋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오빠는 창백해진 얼굴로 냉정하게 코웃음을 치며, '잘 모르겠는데? 별로야.' 라고 말하죠. 처음에는 오빠의 그런 반응에 시무룩했던 저도 나중에는 어떤 패턴을 눈치채게 됐어요. 실제로 그 앨범이 좋았는지 좋지 않았는지는 상관 없었던거예요. 오빠가 제일 좋아했던 밴드는 항상 새로 나온,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는, 독특한 밴드였고 그 밴드가 일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 곧 질려버렸어요. 그보다 더 오빠가 냉정해질 때가 있었어요. 이 때는 정말 무서웠죠. 제가 오빠가 미처 아직 알지 못한, 괜찮은 인디밴드의 음악을 찾아 순전히 오빠를 기쁘게 해 줄 요량으로 들려주면, 오빠는 '누구 음악이야?' 라고 한 다음 자신이 모르는 밴드라는걸 깨달으면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고 '아 그래? 기억난다.' 하면서 나를 일주일동안 쳐다보지도 않았죠."


"와. 정말 알만하네요. 이 힙스터 히틀러! 독재자! 야만인!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예상한대로 격렬한 안나의 반응에 L은 가슴이 화한 민트로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크게 웃었다. 힙스터 히틀러라니! L은 오빠의 연락처 이름을 그렇게 바꾸기로 결심했다.


"저는 오빠가 그랬던 이유가 뭔지는 여태껏 알지 못했어요. 그냥, 자존심 때문에 그러나 했죠. 그런데 아까 안나씨의 말을 들으면서 깨달은거예요. 바로 그거였어! 하고요. 그런 사람들이 있죠. 작은 취향조차 남은 틀리고 내가 맞아야만 자신이 보존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있는 유아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요. 누군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공유함으로써 자신이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게 저는 불쌍해요. 자신만의 세계가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하다고 해도, 타인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세계를 함께 공유하는 기쁨은 그 이상이거든요. 그런데 그 세계를 공유하는 입구를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버리고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특별함에 취한 비애에 빠져있는거예요. '나는 특별해,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어' 하고요. 하지만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을 내쫒아버린거죠.


그 순간 L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주였다. 아차! 내가 어떻게 이때껏 유주를 잊고 있었을까? 정말 까맣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 L은 혼비백산하며 유주의 전화를 받았다.


"어! 나 지금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와있어!"

"너 여지껏 나 버리고 어디에 있었어! 이제 그만 가자. 나 속이 안좋아."

"그래, 밖으로 나와. 짐 챙겨서 가자."


안나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일행한테 전화가 온 모양이네요! L씨가 친구 따라 왔다는걸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L은 머쓱해 하는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래요,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이게 다 안나씨 때문이에요."

부드러운 책망에 안나가 담배 꽁초를 버리고 발로 짓이기며 웃었다. "그래도 저는 후회 안해요.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오늘 L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끔찍하게 지루한 밤이 됐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됐어요. 잘가요 L씨, 그리고 맘이 내킨다면 연락하고 지내요. 사실 저도 타인과 세계를 공유하는 것에 아주 서툰 편이에요. 제 화법이 직설적이고 조금 거친 터라, 사람들은 대부분 제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다며 내빼버리고 말거든요."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안나씨가 말하는 방식이 좋아요. 언젠가 저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제 취향을 비웃고 무시하는 사람에게 톡 쏘아줄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L씨는 잘 할거예요. 자기 중심이 잡혀있으니까요. 보통 멋진 사람들은 그렇죠." L과 안나가 막 연락처를 교환했을 때, 유주가 달려왔다. "여기서 뭐해? 가자! 내가 네 코트랑 가방 챙겨왔어"


안나는 코를 찡긋하며 L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L은 안나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상쾌한 공기에 초콜릿과 오크 향이 나는 담배연기가 감돌았다. L은 명랑한 기분으로 유주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공연 어땠어? 죽이지." 유주의 말에 L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글쎄, 음.." 이 공연은 별로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으며, 지루하기까지 했고 사실 거기에 있는 누군가가 실제로 이 공연을 즐겼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는 말이 L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망설이는 듯한 L의 말에 유주의 표정이 천천히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그 표정에 목구멍에 걸린 말은 빠르게 꿀떡 삼켜지고 말았다. L은 유주의 표정을 살피다가 생각했다. 그 단조롭게 쿵쾅대던 디스코 음악이 별로였다고 이야기 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어차피 나는 디스코 음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공연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아마 그 공연은 멋진 공연이었을 것이다. 단지 내가 몰랐던 거겠지..


"응, 죽이더라. 멋졌어."

"그치? 역시, 취향 좋다니까."


유주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애정을 가득 담아 L을 바라보았고, L은 어쩐지 체한 듯한 기분으로 길바닥을 터벅 터벅 걸어갔다.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