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식해의 맛
일찍부터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요즈음, 시원한 냉면이 먹고싶다며 회사 동료들과 함께 들어간 평양냉면 집의 메뉴에서 나는 별안간 그리움과 마주하게 되었다. "가자미 식해가 뭔지 알아요?"하고 묻는 내 말에 다들 "가자미 식혜요..?"하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했다. 그들은 달콤한 쌀 음료에 가자미 생선 토막이 둥둥 떠다니는 끔찍한 장면을 연상하는 듯 했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당연한듯이 잊혀지고 있었던 그 음식은 작년 추석이 지나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시그니쳐 메뉴였다.
6.25때 남한으로 내려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던 외할머니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큰 양조장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차가운 인상의 냉미녀였던 외할머니는 종종 그때의 모습을 나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모피코트에 비단신발을 신고 가마에서 내려 양산을 펼치면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어. 완전 미녀였지.' 하는 할머니의 말에 '할머니는 고향이 그리워?' 라고 물으면 '뭘 그리워? 그리워할것도 쌨다.' 라고 하며 털털하게 웃었다.
나의 외할머니는 사람들이 흔히 추억하거나 말하는 전형적인 할머니의 이미지와는 아주 달랐다. 차가운 분위기의 미인이었던 할머니는 이북에 있을 때 동네에서 제일 잘생긴 꽃미남과 결혼을 했다.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전쟁 통에 남한으로 피난을 온 후에도 장군을 만나 어려웠던 시대 치고는 나름 호위호식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 시대에는 부자들만 찍을 수 있었다는 흑백사진이 아직도 우리집 앨범에 수십개 보관되어 있던 것을 보면 할머니의 삶을 대충 추측 해 볼 수 있다. 전 남편과 낳았던 두명의 아이와 장군을 만나 낳았던 두명의 아이들은 모두 효자 효녀로 자라 할머니라면 끔찍할만큼 아끼고 보살폈다. 성공한 인생을 산 셈이다.
우렁찬 목소리와 기개있는 풍채를 가졌던 할머니는 항상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았다. 할머니는 언니와 나를 평범한 할머니처럼 '우리 강아지' 라고 부르는 대신 '쌍간나' 라고 불렀는데, 그게 할머니의 가장가는 애칭이었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애정을 담아 털털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던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손자들에게 항상 사랑받았다.
친할머니가 계시지 않은 나에게 외할머니는 나에게 그 둘의 존재를 합쳐놓은 '할머니' 그 이상이었다. 우리 집의 바로 옆집에 살면서 엄마와 함께 우리 자매의 육아를 서툴게나마 담당해주셨던 할머니가 겨울마다 가자미 식해를 만들자며 한바탕 일을 크게 벌렸던 것이 생각난다. 큰 마당에 김장비닐을 깔고 빨간 고무 다라이를 몇개 가져다 놓는다. 엄마와 이모, 할머니는 각자 빨간 고무장갑을 낀 후 몸빼바지를 입은 후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이모는 가자미를 먹기 좋게 토막내 자르고 말렸다. 엄마는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무를 잘라 짭쪼름하게 소금에 절이는 담당이었다. 춥고 힘들어 죽겠는데 매년 겨울마다 이 일을 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엄마는 이 손 많이 가는 음식을 한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조밥과 양념을 담당했다. 가자미 식해에 들어가는 조에는 메조를 쓰는데, 조밥을 고슬하게 지어서 넓게 펴 식힌 후에 다진 파, 다진 마늘, 다진 생강, 고춧가루, 소금과 매실액을 조금 넣은 비법 양념을 넣고 마른 가자미와 무를 넣어 비닐장갑도 끼지 않은 큰 손으로 힘껏 버무렸다. 완성된 가자미 식해는 크고 작은 장독대에 나눠 넣고 몇주일을 삭혔다. 뼈까지 푹 삭은 가자미의 톡 쏘며 말캉한 맛이 술안주로 그만이었는지 아빠는 가자미식해 철만 되면 막걸리를 꺼내 들고 실실 웃음을 흘리며 저녁시간을 고대했다. 아빠가 술을 입에 대기만 해도 타박을 놓던 엄마도 그때에는 너그럽게 눈을 감아주었다.
아직 어려 입맛도 어렸던 나는 감히 삭은 생선을 집어들 생각도 못하고 곁다리에 있는 무만 집어먹었는데, 조밥에 버무려진 무에서 나는 특유의 짭쪼름한 감칠맛과 톡 쏘는 매콤한 맛에 밥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입맛이 유난히 유치했던 언니는 밥상에 가자미식해만 올라오면 계란후라이와 용가리 치킨을 해 주지 않으면 밥을 먹는둥 마는둥 젓가락을 깨작거렸기 때문에 부모님은 '어른 음식'인 가자미 식해를 잘먹는 나를 유독 신기해 했다.
내가 가자미 식해의 삭은 생선을 턱턱 집어 밥에 척 올려 먹어 아빠를 놀라게 한 나이가 됐을 즈음, 식해는 점점 간이 짜졌다. 조금 짠 것 같다는 말에 엄마는 할머니의 간보는 실력이 예전같지 않아 간을 세게 한 모양이라며 조금 슬픈 얼굴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눈으로 얼어붙은 길가에서 넘어져 팔이 크게 다치셨고, 그 후로 급격하게 기력이 쇠했다. 효자, 효녀뿐인 자식들이 항상 옆에서 할머니를 챙겼지만 기력이 쇠한 이후로는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했고, 그때부터 가자미 식해의 맛은 점점 내 기억에서도 사라져갔다.
작년 추석, 갑자기 상태가 많이 안좋다는 할머니의 병문안을 갔었다. 항상 통통하고 혈색이 좋고 목소리가 우렁찼던 할머니를 찾던 나는 한참 헤매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다르게, 또 바로 전 설에 봤던 모습과도 다르게 너무나 말랐던 까닭이다. 조밥을 힘차게 버무리던 솥뚜껑같은 손은 쪼글쪼글 말라붙고 검버섯이 곳곳에 피어있었다. 말을 하기도 힘든 상태의 할머니는 자꾸 자신의 손을 들어 들여다봤다. 할머니는 폭 쉬어버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겠니?" 나는 할머니의 앞에서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을거라는 말을 하는것은 할머니를 기만하는 것만 같아 꺼내지도 못했다. 나는 쪼글쪼글 말라붙어 물컹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만 있었다. 힘들게 숨쉬는 할머니의 숱많은 머리칼을 넘겨주고 땀을 닦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장례식을 치루고서도 나는 할머니가 이제는 아주 없다는 사실이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고, 할머니가 엄청나게 그립지도 않았다. 다음 설에 가면 똑같은 모습과 똑같이 큰 목소리로 나를 반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기억은 사소한 어떤 것에 물밀듯이 쏟아져나온다. 그 옛날 집앞 마당에서 맡았던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을 때 나는 할머니가 못견디게 보고싶다. 회사 동료들과 우연히 들린 평양 냉면집에서 메뉴에 있는 가자미식해를 볼때도 나는 할머니가 못견디게 보고싶다.
얼마 전 나는 엄마에게 가자미식해가 먹고싶어졌다고 졸라댔다. 겨울이 되면 꼭 한번 해 먹자며, 그때 그 맛은 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먹어보고 싶다는 내 말에 엄마는 '가자미 식해가 먹고싶었니?'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엄마와 함께 가자미 식해를 담그며 비법을 알아올 다짐이다. 할머니의 가자미 식해 레시피는 엄마에게로, 엄마의 레시피는 나에게로 이어 내려올 것이다. 사람들이 '가자미..식혜요?..'라고 할 때마다 나는 은근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식혜가 아니고 식해요. 톡 쏘는 맛이 진짜 맛있는데, 저희 할머니가 참 잘하셨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