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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트라 Jan 05. 2024

존엄하게 산다는 것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사람은 더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수없다.


얼떨결에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교 평준화가 되며 평판이 그리 좋지 않던 학교가

외고와 과고가 떨어지고 울며 겨자먹기로 입학한 수재들에 의해 명문이 된 학교이다.


참고로 나랑 내 친구 수지는 그냥 ‘교복이 예쁜 학교’라서 지원했고, 어려움없이 입학했다.


어쨌거나 학구열이 무척이나 치열하던 학교였다.

0교시부터 9교시 수업이 진행되고,

이후에는 전교등수대로 야자 좌석을 배정해주는 야박한 학교였다.

전교 1등부터 20등은 5층 최고층 최고급 독서실.

(야자시간에 20등 안에 드는 엘리트 아니면 지나다니지도 못함)

20-50등은 4층, 단독 칸막이 독서실.

50등부터 100등은 3층 다소 시끄러운 칸막이 독서실.

그 다음은 1-3층, 교실 책상에서 평범한 자율학습.


모두가 고층 독서실을 가기위해 아등바등 거렸다.

그 층수에 있는 아이들끼리 어울렸다.

심지어 급식을 먹는 순서까지 등수대로 먹게했다. (나 졸업한 후에는 이게 뉴스에 나옴)

공부를 잘할수록 밥을 빨리먹고 휴식도 취하고 다음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있으며,

공부를 못하면 한참을 기다리다 허겁지겁 밥을 먹어야만 하는 참 웃긴 구조였다.



그곳에서 낙오되지 않기위해 나는 점심 저녁 두개의 도시락을 싸고 다녔다. 우리 엄마는 나를 픽업하기 위해 운전면허를 땄고, 없는 살림에 중고 옵티마를 사서 데리러 오곤했다.

어린 마음에 쟁쟁한 외제차 사이에 당당하게 낑겨있는 엄마의 낡은 옵티마가 가끔은 부끄럽기도 했던 것 같다.




매번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나를 무엇보다 힘들게 했던 건 사실 경쟁보다 의미였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어째서 대학전공을 점수에 맞춰서 지원해야 하는지’

‘왜 선생님들은 내 시험점수말곤 관심이 없는지’

‘왜 국영수가 체육,음악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건지’


모든게 의문인 고등학교 생활이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한시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한문은 대학가는데 도움이 전혀 되질 않았다.

고등교육의 목표는 주변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나는 공부가 진짜 하기 싫었다.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를 이 의미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생각들은 어느새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십상이었고, 그 물음은 늘상 삶과 죽음에 대한 결론이 나지않는 심오한 생각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깊게 빠질때면,

괜한 데 또 시간을 빼앗겼다며 자책하면서도

‘나... 철학과 가야하는거 아닌가?’ 종종 생각했다.


문과에서 철학을 전공하면 굶어죽는다는 편견이 강했던 터라, 나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도 내뱉지 않았다.

그리고 법대와 사범대를 지원을 신나게 했었고, 원하는 대학에 모두 떨어진 후에는

조금 재능이 있던 노래를 급하게 준비해서 성악과에 진학했다.

수학 대신 성악을 선택한 것이다. 대학을 위해서.




그리고 약 2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요가를 가르친다.

법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고 어쩌다보니 요가강사가 됐다.


그리고 매일 새벽에 공부를 한다. 이 습관도 올해도 8년째다.

그리고 요즘이 가장 공부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수년전부터 입에 달고 살던 말,

여유가 된다면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고 싶다던.

돈을 축적하거나 인생을 효율적으로 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어쩌면 삶에 무용한 것들을 공부하고 싶다.


그것이 곧 삶의 의미가 될 것이니까

그리고 분명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 직감한다.


뜬금없지만 2024년,

내 가슴에 훅 들어온 단어는 존엄(dignity)이다.


삶이 망가졌다고 느낄때마다

나를 일으킨 것은 누군가의 위로나 격려가 아닌

나 스스로 나의 존엄성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였다.


이리저리 헤맸지만,

또 앞으로 수도없이 헤매고 깨지겠지만

여전히 내 삶이 존엄하고 고귀하다는 것엔 이견이 없다.


그리고 ‘존엄하게 삶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가

성실히 그리고 자유로이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준다.



요즘 사회가 참 무섭다.

단편적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한 인격체를 함부로 평가하기도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인맥을 관리하고 정리하기도

이 세상에 돈보다 중헌건 없는것마냥 순식간에 한 사람을 나락으로 보내버리는 일도..

말 그대로 인류애가 바사삭 무너지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생각한다.

지금 사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존엄성 회복이라고.

자기 삶에 대한 존엄.

인류에 대한 존엄.

생명에 대한 존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어떤 생각을 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인간답게 해줄, 우리를 성장하게 해줄 다른 삶의 방향을 선택 할 것인가. / Gerald Hü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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